쉼보르스카 4

두 번은 없다 /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여름에도 겨울에도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 버렸다.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더라?꽃인가, 아님 돌인가? 야속한 시간, 무엇 때문에 너는쓸데없는 두려움을 자아내는가?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

시읽는기쁨 2024.09.29

사진첩 / 쉼보르스카

가족 중에서 사랑 때문에 죽은 이는 아무도 없다. 한때 일어난 일은 그저 그뿐, 신화로 남겨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로미오는 결핵으로 사망했고, 줄리엣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사람들은 늙어빠진 노년이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았다. 눈물로 얼룩진 편지에 답장이 없다는 이유로 이승을 등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지막에는 코에 안경을 걸치고, 장미 꽃다발을 든 평범한 이웃 남자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정부의 남편이 갑자기 돌아와 고풍스러운 옷장 안에서 질식해 죽는 일도 없다! 구두끈과 만틸라, 스커프의 주름 장식이 사진에 나오는 데 방해가 되는 일도 없다. 아무도 영혼 속에 보스의 지옥을 품고 있지 않다! 아무도 권총을 들고 정원으로 나가진 않는다! (어떤 이들은 두개골에 총알이 박혀 죽기도 ..

시읽는기쁨 2021.12.01

경이로움 / 쉼보르스카

무엇 때문에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한 사람인 걸까요? 나머지 다른 이들 다 제쳐두고 오직 이 한 사람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요?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필이면 화요일에?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가죽을 덮어쓰고서? 어째서 내 생은 단 한 번뿐인 걸까요? 무슨 이유로 바로 여기, 지구에 착륙한 걸까요? 이 작은 행성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나 여기에 없었던 걸까요? 모든 시간을 가로질러 왜 하필 지금일까요? 모든 수평선을 뛰어넘어 어째서 여기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천인天人도 아니고, 강장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 걸까요?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

시읽는기쁨 2018.05.24

선택의 가능성 / 쉼보르스카

영화를 더 좋아한다. 고양이를 더 좋아한다. 바르타 강가의 떡갈나무를 더 좋아한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디킨스를 더 좋아한다. 인간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인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나 자신을 더 좋아한다. 실이 꿰어진 바늘을 갖는 것을 더 좋아한다. 초록색을 더 좋아한다. 모든 잘못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단언하지 않는 편을 더 좋아한다. 예외적인 것들을 더 좋아한다. 집을 일찍 나서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의사들과 병이 아닌 다른 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한다. 줄무늬의 오래된 도안을 더 좋아한다. 시를 안 쓰고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 시를 써서 웃음거리가 되는 되는 편을 더 좋아한다. 명확하지 않은 기념일에 집착하는 것보다 하루하루를 기념일처럼 소중히 챙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나에게 아무..

시읽는기쁨 2015.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