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정 6

적설 / 신현정

흰 눈이 쌓이다 보면 그 속이 캄캄하다 흰 눈도 무너질 땐 그 속이 캄캄하다 문득 노송老松이 팔뚝 하나를 주어버린다 - 적설 / 신현정 어제 눈이 많이 내렸다. 서울에 내린 눈으로는 기상 관측 이래 최대라고 한다. 고지대에 있는 우리 집은 밖과 연결되는 도로가 하루 내내 통행 불능이 되었다. 덕분에 낮이 조용해졌다. 오늘에야 느릿느릿 차들이 겨우 움직인다. 눈이 질주하던 자동차를 세우고 거북이가 되게 만들었다. 출근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날 갑자기 이렇게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신선하다. 한나절의 눈만으로도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대도시가 항복을 했다.

시읽는기쁨 2010.01.05

영역 / 신현정

산기슭 집을 샀더니 산이 딸려 왔다 산에 오소리 발자국 나있고 쪽제비가 헤집고 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제비꽃 붓꽃 산나리 피고 멀리 천국에 사는 아기들이 소풍 와서는 똥을 싸고 갔는지 여기 저기 애기똥풀꽃 피고 떡갈나무는 까치부부가 독채를 들었다 풀섶에선 사마귀들이 덜컥덜컥 턱을 부딪히며 싸우는데 허 나도 질세라 집 있는 데서 오십 보 백 보는 더 걸어나가서 오줌이라도 누고 오고 그러는 것이다 - 영역 / 신현정 영역 다툼은 동물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의식이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배경에는 동물적 특징이 잠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을 털 없는 원숭이라고 한 재미있는 표현도 있다. 새로 직장을 옮기면서 그런 영역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자격지심인지 모..

시읽는기쁨 2009.03.06

염소와 풀밭 / 신현정

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발을 넣고 깨끗한 입을 넣고 몸을 넣고 줄에 매여 멀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염소가 발을 넣고 뿔을 넣고 그리는 원을 따라 원을 그리는 하늘도 안쪽은 그의 것 그 안쪽을 지나가는 가슴 큰 구름이며, 새들이며 뜯어먹어도 또 자라는 풀은 그의 것, 그러하냐. - 염소와 풀밭 / 신현정 말뚝에 매인 것이 염소만은 아니다. 누구나 이 시를 읽으면 자신을 염소에 대입시키게 된다. 줄의 길고 짧음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는 말뚝의 운명을 타고 났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런 사실을 비관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에게 주어진한정된 범위의 삶을 즐기고 자족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원 안의 풀이 나의 것이듯, 원의 안쪽을 지나가는 구름이며, 새들 또한 나의 즐거움이 ..

시읽는기쁨 2008.03.04

하나님 놀다 가세요 / 신현정

하나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오늘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들판은 파랑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 염소들의 살랑살랑 나부끼는 거룩한 수염이랑 살랑살랑 나부끼는 뿔이랑 옷 하얗게 입고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 - 하나님 놀다 가세요 / 신현정 염소와 같이 뛰노는 하나님은 생각만 해도 귀엽고 유쾌하다. 아니 하나님은 염소를 닮아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구분도 잘 안된다. 하나님은 거대한 성전, 거룩한 의식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고, 그 모든 것이시다. 그러나 귀여운 아..

시읽는기쁨 2008.01.04

오리 한 줄 / 신현정

저수지 보러 간다 오리들이 줄을 지어 간다 저 줄에 말단이라도 좋은 것이다 꽁무니에 바짝 붙어 가고 싶은 것이다 한 줄이 된다 누군가 망가뜨릴 수 없는 한 줄이 된다 싱그러운 한 줄이 된다 그저 뒤따라 가면 된다 뛰뚱뛰뚱하면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급기야는 꽥꽥대고 싶은 것이다 오리 한 줄 일제히 꽥꽥꽥 오리 한 줄 / 신현정 인간의 줄을 벗어나 차라리 저 뛰뚱거리며 걸어가는 오리들 꽁무니에 서고 싶다. 이념도, 욕망도, 무엇이 되고 싶은 소망도 벗어던지고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오리가 되어 저 뒷줄에 서서 따라가고 싶다. 5/31 지방선거가 끝났다. 사람들은 이 줄 저 줄에 갈라서 섰다. 어떤 사람은 억울해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고소해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 고함 소리는 이제 질린다. 차라..

시읽는기쁨 2006.06.01

일체감 / 신현정

눈이 내리면서 먼저 내리면서 뒤에 내리면서 먼저 내리는 눈이 뒤에 내리는 눈을 사뿐히 받아주기도 하면서 먼저 내리는 눈이 뒤에 내리는 눈을 무동을 태워 세상구경도 시켜주어가면서 먼저 내리면서 뒤에 내리면서 마음을 포개면서 궁극적으로 세상을 덮으면서 한 이불 속을 만드누나 - 일체감 / 신현정 따스하고 평화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시다. 먼저 내리는 눈이 뒤에 내리는 눈을 태워주고 이끌어주면서 세상을 한 이불로 덮는다.더 앞서 가려고 눈송이는 좌충우돌 가속도를 내지 않는다. 덩치 큰 녀석이나 작은 녀석이나 함께 고요히 떨어지고 있다. 이건 단순히 눈 내리는 풍경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희망의 인간 세상을 말하고 있다. 한 이불 속에 든다는 것은 시의 제목처럼 일체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사..

시읽는기쁨 2006.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