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탁번 7

눈뜬장님 / 오탁번

연애할 때는 예쁜 것만 보였다 결혼한 뒤에는 예쁜 것 미운 것 반반씩 보였다 10년 20년 되니 예쁜 것은 잘 안 보였다 30년 40년 지나니 미운 것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눈뜬장님이 됐다 아내는 해가 갈수록 눈이 점점 밝아지나 보다 지난날이 빤히 보이는지 그 옛날 내 구린 짓 죄다 까발리며 옴짝달짝 못하게 한다 눈뜬장님 노약자한테 그러면 못써! - 눈뜬장님 / 오탁번 여자의 기억법은 특이하다. 과거의 서운했던 일은 기막히게 기억해 낸다. 둘 사이에 냉기류가 흐를 때면 어두운 창고 문이 저절로 열리나 보다. 아내의 넋두리를 들어보면 나는 무지 나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한때는 정면 대응을 했지만 이젠 흘려 넘길 수밖에 없다. 창고를 채울 자물쇠가 없다는 걸 늦게서야 알았기 때문이다. 바라건대 아내도 눈뜬..

시읽는기쁨 2021.03.09

굴비 /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아낙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돌아보았다 -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녁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떡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

시읽는기쁨 2020.03.11

헛똑똑이의 시 읽기

고려대학교출판부에서 펴낸 오탁번 시인의 시론이다. 내용이 딱딱하지 않고 쉬우면서 재미있게 읽힌다. 좋은 시란 무엇이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여러 시를 예로 제시하며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시인은 시어의 선택을 굉장히 중시한다. 시인이 되려면 정확한 우리말 쓰기와 함께 심상에 맞는 어휘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시는 언어 예술이기 때문에 단어 하나로 시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오 시인은 미당 서정주를 아주 높게 평가하는데 시는 시 자체로만 봐야지 시인의 인간됨이나 행적은 시 감상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시인을 몰라야 시가 바로 읽힌다. 글쎄, 이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기가 힘들다. 시 작품과 시인을 과연 별개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시인의 삶과 괴리된 시가 좋은..

읽고본느낌 2014.08.10

시집보내다 / 오탁번

새 시집을 내고 나면 시집 발송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속표지에 아무개 님 청람淸覽, 혜존惠存, 소납笑納 반듯하게 쓰고 서명을 한다 주소와 우편번호 일일이 찾아 쓰고 튼튼하게 테이프로 봉해서 길 건나 우체국까지 내 영혼을 안고 간다 시집 한 권 정가 8000원 우표값 840원, * 200권, 300권..... 외로운 내 영혼을 떠나보낸다 십 몇 년 전 을 냈을 때 - 벙어리장갑 받았어요 시집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꽤 왔다 어? 내가 언제 벙어리장갑도 사줬나?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끼고 옥수수수염빛 입김 호호 불면서 내게로 막 뛰어오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진 듯 환하게 웃었다 몇 년 전 을 냈을 때 - 손님 받았어요 시집 받은 이들이 더러더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때면 내 머릿속에 야릇한 서사적 무대가..

시읽는기쁨 2014.07.31

해피 버스데이 / 오탁번

시골 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와 서양 아저씨가 읍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제멋대로인 버스가 한참 후에 왔다 - 왔데이!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 말을 영어인 줄 알고 눈이 파란 아저씨가 오늘은 월요일이라고 대꾸했다 - 먼데이! 버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줄 알고 할머니가 친절하게 말했다 - 버스데이! 오늘이 할머니의 생일이라고 생각한 서양 아저씨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해피 버스데이 투 유! 할머니와 아저씨를 태운 행복한 버스가 힘차게 떠났다 - 해피 버스데이 / 오탁번 라오스나 네팔에 가서 한 달 정도 빈둥거리다 올 생각을 하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을까 봐 제일 걱정이다. 경험 있는 사람은 두려워 말고 그냥 떠나라고 한다. 몸짓 발짓으로도 다 통할 수 있다고......

시읽는기쁨 2012.10.20

한 장의 사진(14)

추석 차례를 지낸 날 밤, 돌아가신 아버님 꿈을 꾸었다. 휠체어에 앉으신 아버님은 의기소침한 채 기력이 없으셨다. 꿈 내용은 이랬다. 어머니와 내가 집에 새 냉장고를 들여놓았는데 아버지와는 상의를 하지 않았다. 무시를 한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 마음을 서운하게 한 것 같다. 나는 아버지에게 가서 죄송하다고 말씀 드렸다. 아버지는 굳은 얼굴에 변화가 없으셨고 알았다, 라고만 하시고 고개를 돌리셨다. 무척 쓸쓸한 표정이어서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는 꿈에서 늘 처량한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지금은꿈이 뜸하지만 여러 해 전에는 아버지 꿈을 자주 꾸었다. 꿈은 대동소이했다. 비를 흠뻑 맞고 후줄그레한 모습을 보이시거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습이셨다. 행방불명된 꿈도 자주 꾸었다. 꿈속에서 아버지는 항상 힘들어하시..

길위의단상 2010.09.25

폭설 /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

시읽는기쁨 2010.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