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14)

샌. 2010. 9. 25. 08:57


추석 차례를 지낸 날 밤, 돌아가신 아버님 꿈을 꾸었다. 휠체어에 앉으신 아버님은 의기소침한 채 기력이 없으셨다. 꿈 내용은 이랬다. 어머니와 내가 집에 새 냉장고를 들여놓았는데 아버지와는 상의를 하지 않았다. 무시를 한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 마음을 서운하게 한 것 같다. 나는 아버지에게 가서 죄송하다고 말씀 드렸다. 아버지는 굳은 얼굴에 변화가 없으셨고 알았다, 라고만 하시고 고개를 돌리셨다. 무척 쓸쓸한 표정이어서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는 꿈에서 늘 처량한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지금은꿈이 뜸하지만 여러 해 전에는 아버지 꿈을 자주 꾸었다. 꿈은 대동소이했다. 비를 흠뻑 맞고 후줄그레한 모습을 보이시거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습이셨다. 행방불명된 꿈도 자주 꾸었다. 꿈속에서 아버지는 항상 힘들어하시고 슬프셨다. 같은 꿈이 반복된다는 것은 무슨 이유가 있을 듯 싶었다. 더구나 좋지 않은 꿈이니 더 신경이 쓰였다. 혹시 산소를 잘못 옮긴 탓은 아닌지 그때는 고민을 많이 했다. 1년여 그렇게 꿈에 보이시더니 어느 때부터 아버지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다행으로 여기고 잊을 수 있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불길한 아버지의 꿈 이후에 나에게는 어려운 일들이 많이 닥쳤다. 순탄하게 살아오던 인생길이 덜컹거리는 자갈길로 변했다. 워낙 뜻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 아버지의 꿈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꿈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있었다. 이번에또 슬픔에 젖어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뵈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무엇이 잘못된 건지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보고 싶기도 하다. 그만큼 답답하다.

 

옛 앨범을 열어 보았다. 설날에 온 가족이 모였을 때 찍은 사진이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니 1970년대 초반의 어느 해였을 것이다. 저 때는 행복했을까? 몇 년 뒤의 사고가 아니었다면 아버지는 지금도 살아계실 것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건강하셨고 열심히 사신 분이셨다.

 

그때로부터 40년 가까이 흘러 어느덧 사진 속 아버지보다 내 나이가 훨씬 많아졌다. 두 분은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다섯 형제만 남았지만 명절이 되어도 다 모이지 못한다.어릴 때 형제이지 어른이 되니 남보다 못한 경우도 있다. 아버지 앞에 면목이 없는 일이다. 꿈에서라도 편안한 모습을 뵌다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니 더 송구하기만 하다. 아버님, 못난 자식 너그러이 봐주시고 저희들이 바르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언젠가는 아버님이 흐뭇하게 바라보실 그날이 찾아오리라 믿습니다. 아버님, 너무 근심 마시고 하늘나라에서 평안하소서!

 

지붕 위에 널린 빨간 고추의 매운 뺨에

가을 햇살 실고추처럼 간지럽고

애벌레로 길고 긴 세월을 땅 속에 살다가

우화羽化되어 하늘로 나는 쓰르라미의

짧은 생애를 끝내는 울음이

두레박에 넘치는 우물물만큼 맑을 때

그 옛날의 사랑이여

우리들이 소곤댔던 정다운 이야기는

추석 송편이 솔잎 내음 속에 익는 해거름

장지문에 창호지 새로 바르면서

따다가 붙인 코스모스 꽃잎처럼

그 때의 빛깔과 향기로 남아 있는가

물동이 이고 눈썹 훔치면서 걸어오던

누나의 발자욱도

배추흰나비 날아오르던

잘 자란 배추밭의 곧바른 밭이랑도

그 자리에 그냥 있는가

방물장수가 풀어놓던

빨간 털실과 오디빛 참빚도

어머니가 퍼주던 보리쌀 한 되만큼 소복하게

다들 그 자리에 잘 있는가

툇마루에 엎드려

몽당연필에 침 발라가며 쓴

단기 4287년 가을 어느 날의 일기도

마분지 공책에

깨알처럼 그냥 그대로 있는가

그 옛날의 사랑이여

 

- 그 옛날의 사랑 / 오탁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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