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 7

화이트 크리스마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밤 사이에 내린 눈이 오전까지 이어지며 지상을 하얗게 덮고 있다. 일주일 넘게 움츠리게 만든 한파도 물러가고 포근한 성탄절이다. 가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가 성탄 축하 인사를 전하며 이사야서의 성탄 예언을 적어 보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친구에게 더욱 애틋하며 간절한 날이 되지 않을까 싶다.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세상의 연약하고 버림 받고 힘없는 존재들이 따스하게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상처 입은 선한 마음도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 흰 눈이 세상을 순일하게 감싸주듯, 안팎의 소란이 잠들고 평화가 찾아온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진속일상 2023.12.25

도토리 두 알 / 박노해

산길에서 주워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 도토리 두 알 / 박노해 분별하고 비교하는 것은 인간의 일일 뿐, 잘난 도토리 못난 도토리가 어디 있겠는가. 땅에 떨어져서 청설모의 먹이가 되든, 어찌해서 참나무로 자라든, 도토리는 각자의 몫을 한 것뿐 거기에 우열은 없다. 들에 핀 꽃이나..

시읽는기쁨 2021.08.30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담쟁이 / 도종환 2009년에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이 시가 내 인생에서 꼭 간직하고 싶은 시 1위를 차지했다. IMF 구제금융 이후부터 이 시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가 위안과 용기를 주는 이런 시를 찾았을 것이다...

시읽는기쁨 2012.07.25

사람이 사람에게 / 홍신선

2월의 덕소 근처에서 보았다 기슭으로 숨은 얼음과 햇볕들이 고픈 배를 마주 껴안고 보는 이 없다고 녹여주며 같이 녹으며 얼다가 하나로 누런 잔등 하나로 잠기어 가라앉은 걸. 입 닥치고 강 가운에서 빠져 죽는 걸. 외돌토리 나뉘인 갈대들이 언저리를 둘러쳐서 그걸 외면하고 막아주는 한가운데서 보았다, 강물이 묵묵히 넓어지는 걸. 사람이 사람에게 위안인 걸. - 사람이 사람에게 / 홍신선 피정에 다녀온 아내에게서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다. 옆에 있던 한 분이 2박3일 내내 울기만 하더란다. 나중에 들은 사연은 이랬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 딸이 갑자기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 사고사였다. 지난 10월의 일이었다. 아들은 고3 수험생으로 수능을 앞두고 있어 누나의 죽음을 알리지도 못했다. 대학..

시읽는기쁨 2012.03.14

이 또한 지나가리니

‘이 또한 지나가리니’ - 이 말의 어원이 다윗이라고도 하고 페르시아의 어느 왕이라고도 한다. 그가 누구였든 간에 기쁠 때 오만하지 않고 슬플 때 좌절하지 않도록 왕은 반지에 이 글귀를 새기고 다녔다고 한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리고 한 순간이다. 지금의 기쁨과 슬픔, 승리와 패배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 정말 현자다운 경구라 할 수 있다. 요사이 많이 힘들다. 어제는 긴 시간 말다툼도 있었다. 오늘 되돌아보니 그나마 감정을 죽이고 참은 게 잘 한 일이었다. 마찰, 불화, 자책, 비난, 원망, 체면을 위한 미소, 본질은 감춘 가식, 내 감정의 많은 부분이 이런 것들로 채워져 있다. 나는 오늘 ‘이 또한 지나가리니’를 생각한다. 행복한 때 자만하지 않기 위해 쓰길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대개는..

길위의단상 2010.06.10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며칠 전 KBS의 ‘TV 동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어느 날 왕이 보석 세공인을 불러 “반지를 만들되 거기에 내가 큰 승리를 거둬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 감정을 조절할 수 있고, 동시에 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는 다시 내게 기운을 북돋워 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는 명령을 내렸다. 보석 세공인은 멋진 반지를 만들었으나 왕의 명령에 합당한 글귀가 아무리 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웃 마을의 현인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현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반지에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고 새겨 넣으시오. 왕이 승리감에 도취해 자만할 때, 또는 패배해서 낙담할 때 그 글귀를 보면 마음이 가라앉을 것이오.” 그렇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모든 것은 한..

참살이의꿈 2006.02.07

풍경(1)

인적 그쳐 한적한 바다에 가고 싶다. 키 큰 바다풀들이 바람에 날리고, 파도 소리 더욱 쓸쓸한 텅 빈 바닷가에 서고 싶다. 사는 건 외롭고 쓸쓸한 일이다. 호탕한 웃음과 화려한 몸짓으로 치장해보지만 세상 일은 여전히 힘겹고 홀로 감당해야 할 몫은 무겁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한데 작은 조각배 한 척 흔들거리며 집 찾아 들어오고 있다. 우리가 돌아갈 안식의 항구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피곤한 내 영혼이 쉴 한 평 따스한 자리가 거기엔 있을까? 거기선 내 고운 사람이 고운 옷 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외로운 마음도, 쓸쓸해진 마음도, 좌절도, 낙담도 저 바다는 다 품어줄 것 같다. 아픔이 아픔으로 위로 받듯, 외로움은 더 큰 외로움으로 위안을 얻을 것이다. 오늘은 저 쓸쓸한 바다에 가고 싶다.

사진속일상 2005.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