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현 6

허수아비 / 조오현

새 떼가 와도 손 흔들고 팔 벌려 웃고 사람이 와도 손 흔들고 팔 벌려 웃고 남의 논 일을 하면서 웃고 있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 논두렁 밟고 서면 -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 가을 들 바라보면 -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손 흔들어주고 숨 돌리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 허수아비 / 조오현 무산(霧山) 스님의 다비식이 어제 건봉사에서 열렸다. 속명을 따라 오현 스님이라고도 한다. 시인이기도 한 스님의 선시(禪詩)는 수도 정신의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핵심을 드러낸다. 스님은 거침없는 언행으로 무애의 삶을 살았다. "가장 승려답지 않으면서, 가장 승려다..

시읽는기쁨 2018.05.31

일색변 / 조오현

1 무심한 한 덩이 바위도 바위소리 들을라면 들어도 들어올려도 끝내 들리지 않아야 그 물론 검버섯 같은 것이 거뭇거뭇 피어나야 2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소리 들을라면 속은 으레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장독(杖毒)들도 남아 있어야 3 사내라고 다 장부 아니여 장부소리 들을라면 몸은 들지 못해도 마음 하나는 다 놓았다 다 들어올려야 그 물론 몰현금(沒弦琴) 한 줄은 그냥 탈 줄 알아야 4 여자라고 다 여자 아니여 여자소리 들을라면 언제 어디서 봐도 거문고줄 같아야 그 물론 진겁(塵劫) 다하도록 기다리는 사람 있어야 5 사랑도 사랑 나름이지 정녕 사랑한다면 연연한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은 되어야 6 놈이라고 다 중놈이냐 중놈소리 들..

시읽는기쁨 2014.07.16

적멸을 위하여 / 조오현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 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 적멸을 위하여 / 조오현 나와 너, 생과 멸의 경계가 사라지는 경지다. 지극한 무위(無爲)며 공(空)이다. 머리가 멍해진다. 부처님 말씀하셨다. "나고 없어짐 벗어나면 고요한 그곳이 즐거움이 된다[生滅滅已 寂滅爲樂]." 흰 눈 덮이는 고요한 밤에 달빛만 교교하다. 적멸(寂滅)을 위하여....

시읽는기쁨 2013.02.15

염장이와 선사 / 조오현

어느 신도님 부음을 받고 문상을 가니 때마침 늙은 염장이가 염습殮襲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염습하는 모양이 얼마나 지극한지 마치 어진 의원이 환자를 진맥하듯 시신屍身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었고, 염을 다 마치고는 마지막 포옹이라고 하고 싶다는 눈길을 주고도 모자라 시취屍臭까지 맡아 보고서야 관 뚜껑을 덮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아침 한솥밥을 먹은 가족이라도 죽으면 시체라 하고 시체라는 말만 들어도 섬쩍지근 소름이 끼쳐 곁에 가기를 싫어하는데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의 타인, 그것도 다 늙고 병들어 죽은 시충屍蟲까지 나오는 시신을 그렇게 정성을 다하는 염장이는 처음 보았기에 이제 상제와 복인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염장이에게 한마디 말을 건네 보았습니다. "처사님은 염을 하신 지 몇 해나 되..

시읽는기쁨 2011.02.06

아지랑이 / 조오현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 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이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 아지랑이 / 조오현 인생의 어느 순간에 우리는 깊은 낭떠러지와 맞닥뜨린다. 거기는 나아갈 길도 물러설 길도 없는 끝없는 허공이다. 거기서 나는 나를 지탱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발견한다. 재물도, 권력도, 하늘로 알고 믿었던 신념도 모두가 손에 잡히지 않는 아지랑이일 뿐이었다. 바람 속의 먼지일 뿐이었다. 마른 지푸라기 같은 허망한 것을 껴안고 나는 일생을 씨름하며 살았다. 그러나 허공은 허무와는 다르다. 허공은 충만한 '텅 빔'이다. 모든 것..

시읽는기쁨 2007.11.02

아득한 성자 / 조오현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 아득한 성자 / 조오현 이런 시를 말로 설명하고 머리로 이해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지 모른다. 시인은, 참으로 좋은 말은 입이 없어야 할 수 있고, 참으로 좋은 말은 귀가 없어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입과 귀라는 방편을 이용해야 진리의 그림자라도 밟아볼 수 있는 것을.... 하루 속에 천년이 들어있고, 천년 또한 하루에 다르지 않다. 인간의 일생이 하루살이와 무엇이 다르랴. 백년, 천년의 물리적 시간이 의미 있는 것..

시읽는기쁨 2007.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