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7

나의 행복 / 천상병

나는 아주 가난해도 그래도 행복한 편이다. 돈은 아내가 벌고 나는 놀면서 지내니까! 오십세살이니 부지런한 게 딱 싫고 그저 KBS 제1FM방송. 이 방송은 거의가 고전음악인데 고전음악광인 나는 그래서 행복의 진짜 맛이다. 막걸리 한 되 한 병을 매일같이 마누라가 사준다. 한 병을 정오에 사면 6시까지 가니 어찌 탓하랴? 나에겐 내일도 없고 걱정거리랑 없다.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 하셨는데 어찌 어기겠습니까? 행복은 충족이다. 나 이상의 행복은 없고, 욕망이라고는 없으니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 나의 행복 / 천상병 시인의 나이 쉰셋이면 1982년에 쓴 시로, 의정부 장암동에 있던 허름한 집에 살던 시절이다. 여느 시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기교가 들어가지 않은 천진난만함 그대로다. 천상병표 행복..

시읽는기쁨 2023.07.26

추석날 동네 산책

추석이지만 연 이태째 고향에 못 내려갔다. 예전에 어느 정치인이 '자의 반 타의 반'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는데 지금 내 사정이 그러하다. 교통 정체를 안 겪고 번거로운 만남이 생략되니 몸은 편해도 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쓸쓸한 추석 명절이다. 오전까지 비가 내리더니 오후가 되자 짙은 구름이 사라지고 밝은 가을 하늘이 열렸다. 비 내리다가 맑아지고, 맑다가 다시 흐려지고, 하는 것은 인생사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시름을 잊으려 동네 산책길에 나섰다. 집 앞 공터에 이제서야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었다. 뜸 들인지 10년 만이다. 이 동네에 이사온 뒤로 아파트가 엄청 많이 들어서고 있다. 전에는 상수원 보호 구역이라 아파트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모두 해제된 모양이다. 경기광주역 주변의 역세권 개발로..

사진속일상 2021.09.22

수락산길을 걷다

10여 년 전 쯤이었다. 탈서울을 결심하고는 서울과의 안녕을 기념으로 서울과근교의 모든 산을 올랐던 적이 있었다. 그때 수락산을 오른 뒤 이번에 두 번째로 수락산을 찾았다. J, Y, 두 형과 함께 했다. 지하철 장암역에서 만나 박세당 고택을 지나니 바로 계곡으로 연결되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석림사가 나왔다. 매월당 김시습이 은거했던 절이라고 J 형이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계곡에서 쉬기도 하면서 쉬엄쉬엄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수락산은 화강암 암반으로 되어 있는데 이름 그대로 물이 풍부하고 계곡도 잘 발달되어 있다. 북한산이나 도봉산의 명성에 가려 있어 자주 찾지 않았지만 수락산만의 아름다움을 이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날씨는 구름이 잔뜩 끼었고 가는 비가 오락가락했다. 우산을 쓸까말까 망설이게 하는 ..

사진속일상 2010.08.12

행복 / 천상병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 행복 / 천상병 괴테는 자신의 일생동안 행복했던 때는 17시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그 과실을 맛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시대에 행복하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모욕적이기도 하다. 자급자족하는 로빈슨 크루소가 되지 않는 한 나..

시읽는기쁨 2009.12.21

구절초(3)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 들국화 / 천상병 가을에 들판에 피는 꽃을 통칭해서 사람들은 대개 들국화라고 부른다. 구절초, 쑥부쟁이, 벌개미취, 감국 같은 종류다. 하나하나 제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냥 들국화라고 하는 것도 그리 나빠보이지는 않는다. 들국화라는 어감도 좋고, 또 들국화라는 말에는 가을의 정취가 듬뿍 느껴지기 때문이다. 길을 지나다가 구절초를 보았다. 가을이구나! 가을은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직하며 짜여지는 천이다. 올 가을에는 어떤 무늬, 어떤 색조로 된 그림이 그려질까? 그런데 왜 그런지 올 가을은 허전하고 쓸쓸할 것같다. 그러나 가을 바람이 지..

꽃들의향기 2009.09.26

나의 가난함 / 천상병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각 문학사에서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 나의 가난함 / 천상병 올 설날도 가장 자주 들었던 덕담이 "돈 많이 벌어라" "부자 되어라"는 것이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과 같이 어렵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서로 하늘나라에 가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도 좋아하니 참 묘한 일이다. 하루치의 막걸리와 담배만 있다면 행복하다고 말했던 시인 천상병,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높이 중에서 가난을..

시읽는기쁨 2008.02.10

귀천 /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리라..... - 귀천 / 천상병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야 당신의 자리가 컸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야 당신의 사랑이 지극했음을 압니다. 당신이 떠나시고 나서야 당신의 인품이 온화하고 따스했음을 압니다. 자식들에 대한 그 사랑을 어찌 버려두고 가실 수 있었나요? 다시 못 올 먼 길을 어찌 그리 빨리 재촉해 떠나셨나요? 남은 우리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그래도 당신은 행복했었다고 얘기합니다. 병고에무너져 내리는 당신을 보며 유약하다고 탓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당신..

시읽는기쁨 2004.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