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5

따뜻한 편지 / 이영춘

비는 오는데 우체국 창가에서 순번을 기다리다 지쳐 아들아 이 편지를 쓴다 "춘천 우체국에 가면 실장이 직접 나와 고객들 포장박스도 묶어주고 노모 같은 분들의 입, 출금 전표도 대신 써주더라."고 쓴다 아들아, 이 시간 너는 어느 자리에서 어느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쓴다 나도 공직에 있을 때 제대로 했는지 돌아보겠지만 너도 우체국 실장처럼 그렇게 하라고 일러주고 싶은 시간이다 겨울날 창틈으로 스며드는 햇살 받아 안듯 "비 오는 날 문턱까지 손수 우산을 받쳐주는 그런 상사도 있더라"고 덧붙여 쓴다 살다 보면 한쪽 옆구리 뻥 뚫린 듯 휑한 날도 많지만 마음 따뜻한 날은 따뜻한 사람 때문이란 걸 알아야 한다 빗줄기 속에서, 혹은 땡볕 속에서 절뚝이며 걸어가는 촌로를 볼 때가 있을 것이다..

시읽는기쁨 2018.03.30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이오덕 선생과 권정생 선생이 생전에 주고받은 편지 모음집이다. 1973년에 만난 두 사람은 평생을 함께하며 편지를 주고받았다. 당시 이 선생은 마흔아홉, 권 선생은 서른일곱이었다. 아동문학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분은 인생의 도반이 되어 사귀었다. 1976년 5월 31일 권 선생의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혹시 만나 뵐까 싶어 버스 정류소에서 서성거려 보았습니다." 숨어 살던 권 선생을 세상에 알린 분이 이오덕 선생이다.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격려하고, 책 출판을 도와주었다. 권정생 선생이 평생을 병고에 시달린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편지를 보니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상상 이상이었다. 아마 편지에서도 이 선생이 염려할까 봐 제대로 밝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목숨을 걸고 썼다는 말이 맞을 것 ..

읽고본느낌 2017.10.10

이상의 연애편지

얼마 전에 이상(李箱)의 연애편지가 발굴되어 공개되었다. 1935년에 쓴 이 편지는 25살 된 이상이 소설가 최정희를 연모해서 보낸 글이다. 최정희는 백석으로부터도 사랑의 고백을 들었다고 하니 당대의 문학마당에서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천재시인이라 불리고 난해한 시로 유명한 이상이지만 연애편지는 뭇 연인의 심정과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마음과 그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아쉬움이 애틋하게 적혀 있다. 청년 시절 이상의 한 단면을 엿보게 되어 흥미롭다. 뒷날 최정희는 시인 김동환과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는데, 그중 소설가 김지원과 김채원은 이상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세상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다. 지금 편지를 받았으나 어쩐지 당신이 내게 준 글이라고는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 슬픕니다. 당신이 내게 이러한 ..

길위의단상 2014.08.01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초판이 나온지 20년이 넘은 책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 생활을 하며 고향에 있는 두 아들, 흑산도에 유배된 형,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이다. 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엿보는데 편지만큼 솔직한 것도 없다. 다산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근엄한 학자가 아닌 이웃집 아저씨 같은 선생의 인간적 면모를 만나게 된다. 다산 역시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했고, 학문에 정진하는 모습을 기뻐했다. 지켜야 할 예절에서부터 채소밭 가꾸는 방법까지 가르쳐주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또한 형의 건강을 염려해서 개고기 요리하는 법까지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절로 미소가 일어난다. 번역한 이는 다산을, '칠흑같이 어두운 봉건시대에 실낱 같은 한 줄기의 민중적 의지로 75년 동안 치열하게 살다가 사라져간 위대한 인..

읽고본느낌 2012.11.25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쳐다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

시읽는기쁨 2006.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