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 8

심심함의 변명

나는 외출보다 집에서 보내는 날이 더 많다. 대략 두 배쯤 된다. 한 달이면 20일 정도는 집에 있고, 10일 정도밖에 나간다. 다른 사람에 비하면 활동량이 적은 편이다. 집에 있을 때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지낸다. 당신은 심심하지도 않느냐고, 아내가 늘 신기해 한다. 사람들은 하루를 무언가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 없는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다. 퇴직한 이후도 마찬가지다. 삶의 관성이란 무섭다. 봉사 활동이든 취미 생활이든 뭔가를 해야 한다. 그전까지 일 속에서 살아온 습관이 몸에 밴 것이다. 은퇴 후에도 바쁘게 보낸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현대인은 혼자 있는 시간을 앗기고 있다. 휴대폰이 등장한 이후로는 더 심해졌다. 전철에서 보면 열에 아홉은 휴대폰으로 뭔가를 한다. 휴대폰이 없..

참살이의꿈 2023.06.23

심심한 삶

은퇴한 이후 내 삶은 심심하게 되는 것이었다. 보통은 퇴직 이후에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한다. 심심한 삶은 기피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일을 만들지 않고 얼마나 충분히 심심해지느냐가 내 목표였다. 그러니 퇴직 이후의 삶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루하루 빈둥거리며 놀겠다는데 미래에 대한 염려도 없다. 다행히 연금이 나오니 먹고사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만큼 팔자 좋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심심함이란 혼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삶이다. 관계에서 기쁨을 찾는 게 아니라 홀로 자족하는 즐거움이다. 다른 사람 눈에는 지루해 보이겠지만 심심한 삶은 그리 못된 게 아니다. 나름대로 은근한 행복이 있다. 다만 사람들이 모를 뿐이다. 나는 단순함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믿는다. 노인이 ..

참살이의꿈 2016.08.23

한중(閑中) / 서거정

홍진에 묻혀 백발이 되도록 살아 왔는데 세상살이 가운데 어떤 즐거움이 한가로움만 같으리 한가로이 읊고, 한가로이 술 마시며, 한가로이 거닐고 한가로이 앉고, 한가로이 잠자며, 한가로이 산을 즐기네 白髮紅塵閱世間 世間何樂得如閑 閑吟閑酌仍閑步 閑坐閑眠閑愛山 - 閑中 / 徐居正 내 구미에 맞는 시지만 딴지를 걸어보련다. 유한계급의 한가한 삶이란 여러 하인과 노예의 희생이 있어 가능한 게 사실이다. 그들의 노동과 시중이 없다면 어떻게 이런 불한당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한가롭게 살고 싶건만 한가롭게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들의 시간과 돈을 뺏은 특정 계층의 여가가 음풍농월을 낳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과거의 거대한 유적이나 건물을 보고 감탄하면서도 마음 한 편이 불편한 이유다. 지금 우리..

시읽는기쁨 2015.02.11

장자[177]

옛 성인은 궁할 때는 가문 사람들에게 가난을 잊도록 하고, 영달할 때는 왕공들로 하여금 작록을 잊고 낮추도록 교화하며, 사물에 대해서는 더불어 편안하게 하고, 사람들에게는 원하는 물자를 유통시켜 자기를 보전케 했소. 그러므로 혹은 말없이 사람들을 화목하게 다독거리며 사람들과 벗하여 나란히 서 있지만 사람들을 교화시키오. 부자간에 마땅하면 다른 사람도 편안하게 될 것이니 한결같이 한가하게 그들을 풀어놓소. 故聖人 其窮也 使家人忘其貧 其達也 使王公忘其爵祿 而化卑 其於物也 與之爲娛矣 其於人也 樂物之通 而保己焉 故或不言 而飮人之和 與人竝立而使人化 父子之宜 彼其乎歸居 而一閒其所施 - 則陽 1 칙양(則陽)편이다. 다른 잡편과 마찬가지로처음에 나오는 단어로 편의 이름을 삼은 것이다. 칙양은 노나라 사람인데 물론 그가..

삶의나침반 2011.08.23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 공광규

얼굴 표정과 걸친 옷이 제각각인 논산 영주사 수백 나한 언제 무너져 덮칠지 모르는 바위벼랑에 앉아 편안하게 햇볕 쬐고 있다 새 소리 벌레 소리 잡아먹는 스피커 염불 소리에 아랑곳 않고 지저분한 정화수 탓하지 않고 들쥐가 과일 파먹어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다 다람쥐가 몸뚱이 타고 다녀도 아랑곳 않고 산새가 머리 위에 똥을 깔겨도 그냥 웃는다 초파일 연등에 매달린 이름들 세파처럼 펄럭여도 가여워 않고 시주돈 많든 적든 상관 않는다 잿밥에 관심이 더한 스님도 꾸짖지 않는다 불륜 남녀가 놀러 와 합장해도 혼내지 않고 아이들 돌팔매에 고꾸라져도 누가 와서 제자리에 앉혀줄 때까지 그 자세 그 모습이다 바람이 휙 지나다 하얀 산꽃잎 머리 위로 흩뿌리면 그것이 한줌 바람인 줄만 알고..... 들짐승과 날새 흘러가는..

시읽는기쁨 2010.07.11

Leisure / W. H. Davies

What is this life if, full of care, We have no time to stand and stare No time to stand beneath the boughs And stare as long as sheeps or cows No time to see, when woods we pass, Where squirrels hide their nuts in grass. No time to see, in broad daylight, Streams full of stars, Like skies at night. - Leisure / W. H. Davies 무슨 인생이 그럴까, 근심에 찌들어 가던 길 멈춰 서 바라볼 시간 없다면 양이나 젖소들처럼 나무 아래 서서 쉬엄쉬엄 바라볼 틈 없다..

시읽는기쁨 2006.07.31

독거(獨居) / 이원규

남들 출근할 때 섬진강 청둥오리 떼와 더불어 물수제비를 날린다 남들 머리 싸매고 일할 때 낮잠을 자다 지겨우면 선유동 계곡에 들어가 탁족을 한다 미안하지만 남들 바삐 출장 갈 때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일주를 하고 정말이지 미안하지만 남들 야근 할 때 대나무 평상 모기장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작설차를 마시고 남들 일중독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일 없이 심심한 시를 쓴다 그래도 굳이 할 일이 있다면 가끔 굶거나 조금 외로워하는 것일 뿐 사실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지만 내게 일이 있다면 그것은 노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 곧 죄일 때 그저 노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가 스스로 위로하고 치하하며 섬진강 산 그림자 위로 다시 물수제비를 날린다 이미 젖은 돌은 더 이상 젖지 않는다 - 독거(獨居) / 이원규 나는 자본이 돌리..

시읽는기쁨 2006.04.25

한가한 오후

한가한 오후 시간이다. 창 밖의하늘은 짙은 구름으로 덮여 있다. 금새라도 비가 내릴듯 하다. 하늘은 연한 잿빛 도화지같다. 긴 붓에 무지개빛 물감을 묻혀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고 즐거워 할 그런 그림이면 좋겠다. 텅 빈하늘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을 타서 마신다. 찻잔의 온기가 따스하다. 달콤한 향이 오늘따라 특히 고맙다. 근 한 달 가까이 술과 커피를 멀리 했다. 속이 아파서 식사도조심하며 지냈다. 가끔씩 속이 그렇게 심술을 부린다. 오랜만에 맛보는 커피 향이 그래서 고맙고 향기롭다. 사실 산다는게 별 것아니지 싶다. 인간이 뭐 대단한 것 같아도 내적 만족이나 행복은 거창한 데서 오지 않는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 반짝이는 보석은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곳에 숨어있는지 모..

길위의단상 2003.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