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자 3

완행열차 / 허영자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국화 애틋이 숨어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모를 뻔했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상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는 모를 뻔했지 - 완행열차 / 허영자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유학을 와서는 고향을 오갈 때면 늘 완행열차를 타고 다녔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완행열차는 작은 시골역까지 찾아 쉬면서 느릿느릿 달렸다. 지금 감각으로는 달렸다고 하기에도 민망한데 고향까지 가는 데는 거의 7 시간이 걸렸다. 또 마음 착한 완행열차는 교행하는 기차가 있으면 한없이 기다려줄 줄도 알았다. 바깥 풍경을 여유있게 감상하..

시읽는기쁨 2009.03.13

무지개를 사랑한 걸 / 허영자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것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 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 무지개를 사랑한 걸 / 허영자 집을 떠나 무지개를 따라 나섰지. 어느 날 무지개는 사라지고, 나는 저녁 빈 들판에 홀로 남게 되었네. 사람들의 마을은 멀고, 빈 들의 바람은 차갑기만 하네. 그러나 먼 땅 위로 외로운 별 하나 떠오르고, 어두운 길에서는 낯 선친구를 만날지도 모르리. 무지개를 사랑한 걸 결코 후회하지는 않으리....

시읽는기쁨 2006.01.13

가을날 / 허영자

세상엔 가을이 우리한텐 이별이 왔다 안녕히 늘 안녕히 우리는 가난한 연인이나 가진 것 모두 서로 주었기 빈 알몸으로 후회는 없다 꽃이나 나무나 온갖 식물이 그러하듯 나도 빛나는 사랑의 열매 하나 달고 이 愁心 깊은 계절을 견디리라 정녕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던 열정의 시간 보랏빛 추억의 때를 저 높다란 구름 선반 위에 갈무리 하느니 더욱 넉넉히 허용될 아름다운 날을 위하여 낙엽 쌓인 조롱길이 열린다 가앙 가앙 푸르른 가을 하늘 열린다 - 가을날 / 허영자 올해는 유난히 파란 가을 하늘이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다. 되돌아보니 봄에는 황사도 덜 했고, 여름 태풍도 비켜갔고, 비 피해도 적었고, 다른 해보다 자연 혜택을 많이 받은 해인 것 같아 고맙다. 상대적인지 이웃 일본은 태풍과 지진의 자연 재해로 ..

시읽는기쁨 2004.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