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 4

송년회 / 황인숙

칠순 여인네가 환갑내기 여인네한테 말했다지 "환갑이면 뭘 입어도 예쁠 때야!" 그 얘기를 들려주며 들으며 오십대 우리는 깔깔 웃었다 나는 왜 항상 늙은 기분으로 살았을까 마흔에도 그랬고 서른에도 그랬다 그게 내가 살아본 가장 많은 나이라서 지금은, 내가 살아갈 가장 적은 나이 이런 생각, 노년의 몰약 아님 간명한 이치 내 척추는 아주 곧고 생각 또한 그렇다 (아마도) - 송년회 / 황인숙 다가올 날들을 기준으로 하면 지금이 가장 젊다. 간명한 이치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나이 많이 먹었다는 타령을 한다. 지나온 과거를 껴입고 살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지금 젊지도 늙지도 않았다. 그저 현 상태로 존재할 뿐이다. 쉼 없이 변하는 중의 한 찰나를 살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나이를 초월해서 삶을 ..

시읽는기쁨 2018.01.08

봄눈 온다 / 황인숙

나무가 눈을 뜨면 저 눈(雪)은 자취도 없을 것이다. 나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눈. 자기를 깨운 것이 봄바람이거나 봄비이거나 봄볕인 줄 알겠지. 나를 깨운 것은 내가 막 눈을 뜬 순간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가 아닐지도 몰라. 오,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 나를 바라보다 사라진 이여 이중으로 물거품이 된 알지 못할 것들이여. - 봄눈 온다 / 황인숙 우주에서 관측 가능한 물질은 전체의 5%도 안 된다. 95%는 우리가 모르는 암흑물질이다. 사람의 마음도 드러나 있지 않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 안 보이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실체는 그들이다. 눈에 보이고 감지되는 것은 존재의 극히 사소한 일부일 뿐이다. 너무 호들갑 떨지 말자. 거대한 침묵 앞에서 그저 두려울 뿐.

시읽는기쁨 2016.02.23

바람 부는 날이면 / 황인숙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벌판을 뒤흔드는 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네 스커트자락의 상쾌! - 바람 부는 날이면 / 황인숙 여자가 되어보고 싶다. 바람 부는 날, 스커트 입고 벌판에 서보고 싶다. 스커트자락이 가슴 위까지 치솟아오를 때 여자만이 느낄 상쾌함을 맛보고 싶다. '상쾌'란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 말 속에는 남자는 죽어도 알아차리지 못할 여자만의 비밀이 숨어있을 것 같다. 여자들의 감성, 여자들이 느끼는 사랑, 여자들에게만 주어진 축복들, 그 내밀한 속마음을 나도 한 번 나의 것으로 느껴보고 싶다.

시읽는기쁨 2007.11.30

조용한 이웃 / 황인숙

부엌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나는 이따금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잘 보이지는 않는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닥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지금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그리고 봄기운을 한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것이다 - 조용한 이웃 / 황인숙 나무보다 더 아름다운 시는 없다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시인 또한 부엌 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를 통해 성자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들 식탁에 오른 것은 햇살과 바람이다. 반면에 시인은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며 인간 식탁의 탐욕과 살육을 새삼스레 느꼈을지 모른다. 어제 저녁 전체 회..

시읽는기쁨 2007.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