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 40

영혼의 식사

, 로 만난 위화(余華)는 인생의 고통과 비극을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묘사해 인상적이었다. 위화는 색깔이 분명한 매력적인 작가다. 문학의 위대한 점은 인간을 바라보는 동정과 연민의 마음에 있고, 이런 느낌을 철저하게 표출해내는데 있다고 했다. 위화는 인간의 내면을 따스한 시선으로 깊이 들여다볼 줄 안다. 는 위화의 산문집이다. 아들을 키우며 느낀 단상, 유년시절의 추억, 그리고 글쓰기와 자신이 쓴 책에 대한 생각을 모았다. 소설과는 다른 위화의 실제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위화의 색깔은 여기서도 온전히 드러난다. 작가가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어린 아들을 키우면서 쓴 수필 중에서 두 편을 골라 보았다. 슬며시 미소가 떠오르게 되는 글이다. 자..

읽고본느낌 2011.10.08

조용히 살고 싶어라

집 앞에 태권도 학원이 생겼다. 덕분에 시끄러운 소음을 견뎌야 한다. 초기여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은지 기합 소리가 요란하다. 위층에서는 쿵쿵거리고 밖에서는 아이들 함성이 신경을 자극한다. 집에 주로 있다 보니 소음에 더 예민해졌다. 조용히 살고 싶다는 의지가 강할수록 마음은 더 시끄러워진다. 이곳 아파트 단지는 젊은 가구가 대부분이다. 우리 윗집, 아랫집, 옆집에는 전부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다. 놀이터에도 언제나 아이들로 시끌벅적하다. 전에 서울에 살 때는 양로원이라 할 정도로 아이들 보기가 어려웠다. 엘리베이터에 타도 항상 나이 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이쁘게 보면 활기차서 좋고, 밉게 보면 너무 소란하다. 처음 이사 와서는 위층에서 아이들..

길위의단상 2011.10.07

운림산방 소나무

진도에 있는 운림산방(雲林山房)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7-1890)) 선생이 말년에 거처하던 곳이다. 선생은 스승인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운림산방을 짓고 그림에 몰두했다. 이곳은 해발 485m의 첨찰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바로 옆에는 쌍계사가 있다. 운림산방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이 소나무가 눈에 띈다.탈속한 듯 자유분방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전시장에 있는 산수화 속의 모델이 되었을 것도 같다. 물론 훨씬 후대에 심은 것으로 보이지만 운림산방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운림산방에는 이 외에도 단아한 모양의 동백, 버드나무, 배롱나무 등이 아름다운 정원을 장식하고 있다.

천년의나무 2011.10.06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 박우현

이십 대에는 서른이 두려웠다 서른이 되면 죽는 줄 알았다 이윽고 서른이 되었고 싱겁게 난 살아 있었다 마흔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삼십 대에는 마흔이 두려웠다 마흔이 되면 세상 끝나는 줄 알았다 이윽고 마흔이 되었고 난 슬프게 멀쩡했다 쉰이 되니 그때가 그리 아름다운 나이였다 예순이 되면 쉰이 그러리라 일흔이 되면 예순이 그러리라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 모든 나이는 아름답다 다만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다 -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 / 박우현 시인의 말처럼 젊었을 때는 마흔이 되고, 쉰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무슨 재미로 살까 싶었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어 돌아보니 마흔과 쉰이야말로 인생의 절정기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뒷날이 되어 오늘..

시읽는기쁨 2011.10.06

광한루원에서 널뛰기

하루는 남원 광한루원에 다녀왔다. 이번에는 장모님도 동행했다.딸과 함께 온 것은 20년도 더 되었다. 그때는 딸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닐 때였다. 첫째가다 큰만큼이나 광한루원 안의 나무도 울창해졌다.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첫째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이것저것 탈 것을 좋아하는 게 어린 아이일때와 똑 같았다. 그네를 타고, 널을 뛰고, 형틀에도 묶였다. 첫째 때문에 자주웃을 수 있었다. 나중에는 손주 재롱이 기쁘게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데 모녀가 널을 뛰는 모습은 너무 웃겼다. 처음으로 동영상으로 남겨 보았다.

사진속일상 2011.10.05

선운사 꽃무릇

선운사 꽃무릇은 제 때에 본 적이 없다. 꼭 몇 박자씩 늦는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이미 90% 이상이 져버렸다. 매표소 옆에 있는 꽃밭이 그나마 화려한 뒤태를 보여준다. 절을 지나면서부터는 거의 전멸이다. 어쩌다 성한 송이가 보이면 감지덕지하며 사진을 찍는다.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다. 내년에는 꼭 절정기에 만나고 싶다. 고창 선운사 꽃무릇은 9월 20일 전후에 불이 붙는다.

꽃들의향기 2011.10.05

풍랑이 없으면 풍어도 없다

그날, 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으며 이런 말을 들었다. 바다에서 평생을 보낸 늙은 어부가 전해준 말이었다. “풍랑이 없으면 풍어도 없습니다.”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풍랑 없기를 바랄 수는 없다.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고비가 길지 않은 인생에서도 여러 차례 있다. 그러나 풍랑이 어부를 단련시키고 먼 바다로 나갈 용기를 준다. 먼 바다로 나갈 용기가 없다면 만선의 기쁨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이유 없이 찾아오는 고난은 힘들고 고통스럽다. 되도록 풍파 없이 무난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고난이 주는 선물이 반드시 있다. 풍랑을 뚫고 나아갈 때 풍어의 선물이 주어진다. 인간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성장한다. 인간은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다. 모든 것이 ..

참살이의꿈 2011.10.05

진도 가족여행

진도로 1박2일의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올 초부터 아이들이 결혼하기 전에 함께 여행을 가길 계획했었지만 서로 일정이 맞지 않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시집간 둘째는 빠지고 첫째만 동행했다. 원래는 울릉도를 생각했지만 장시간 배를 타는데 부담을 느껴서 진도로 결정했다. 진도는 멀었다. 전주에서 가는데도 꼬박 세 시간이 걸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진도대교 주변에서는 명량대첩 축제를 하고 있었다. 축제라면 교통 혼잡과 소란스러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경험한 지자체들의 축제는 대부분 그랬다. 이름에 걸맞는 내용은 없고 그저 시끄러운 장터에 불과했다. 그래서 축제장이라면 아예 피한다. 그러나 차 없는 진도대교를 걸어서 건너볼 기회는 오늘밖에 없었다. 마침 당시의 해전 상황을 재현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사진속일상 2011.10.04

3000

블로그에 올린 글 수가 3,000개를 기록했다. 블로그를 시작한지 8년여 만이다. 매일 하나씩의 글을 쓰자고 약속하며 블로그를 2003년에 열었는데 지금까지 그 다짐을 잘 지켜온 셈이다. 내용이나 양보다 매일 꾸준히 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집을 떠나 인터넷 접속이 안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떻게든 글을 올리려 노력했다. 매일매일 한 걸음씩 걸어왔다는 게 소중하다. 처음 블로그를 시작했을 때 대문 이름은 ‘마가리의 꿈’이었다. 백석 시에 나오는 ‘마가리’는 당시 내 귀촌 생활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그 후 꿈이 깨지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문패는 ‘내 마음의 뒤란’으로 바뀌었다. 블로그는 답답하고 울적한 심정을 토로하고 위안을 받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재작년부터는 지금의 ‘먼.산.바.라.기.’를 쓰..

길위의단상 2011.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