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 40

시마 / 유용주

그대가 없는 날에도 햇빛은 투명하고 고바우 슈퍼는 문을 열고 우체국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꽃은 피어 바람은 불고 강물은 제 갈 길로 가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병원과 약국과 술집과 터미널이 붐비고 붐비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마루는 빗자루와 걸레의 애무를 받고 의자 위로 두툼한 엉덩이들이 내려앉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연못의 물고기들은 은빛 지느러미를 흔들거리고 촛불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깜빡거리고 먼지도 눈을 뜨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시장에선 배추와 무와 하지감자가 바구니 속으로 담기고 돼지와 소들이 여러 토막으로 잘려나가고 알몸둥이의 닭들이 펄펄 끓는 기름솥 속으로 투신을 하고 비듬나물과 상추와 풋고추와 옥수수와 멍게, 해삼, 오징어들이 좌판 위에 진열되고 그대가 없는 날에도..

시읽는기쁨 2011.10.31

사인암

사인암(舍人巖)은 단양8경 중 하나로 직벽의 바위가 병풍처럼 웅장하게 서 있는 절경이다. 추사 김정희도 하늘에서 내려온 한 폭의 그림이라며 칭송했다 한다. 사인암 표면은 마치 여러 개의 조각보를 붙인듯 색깔이나 크기가 다양하게 나누어져 있어 아름다움을 더한다. 사인암이라는 이름은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3-1342)이 지냈던 사인(舍人)이라는 벼슬에서 유래되었다. 선생은 단양이 고향으로 이곳을 사랑하여 자주 찾았다고 한다. 선생이 지은 시조에 탄로가(嘆老歌)가 있는데 그중 한 수가 사인암 앞에도 시비로 새겨져 있다. 한 손에 가시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고향에 가까이 있어 사인암은 예전에도 보았던 곳이지만 ..

사진속일상 2011.10.30

미친 놈들

지난 26일에 도올 김용옥 선생이 광화문광장에서 1인 시위를 했다는 소식을 늦게야 들었다. 선생은 지금 EBS에서 '중용, 인간의 맛'이란 강의를 하고 있는데, 예정된 내용에서 반도 진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돌연 강의 중단 통보를 받은 것이다. 현장에서 도올은이 정권에 대해 직설적으로 "미친 놈들!"이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중용, 인간의 맛'은 내가 지금 가장 열심히 보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한신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정규 과목 강의인데 EBS에서 일반인들을 위해 중계해 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9월부터 시작해서 총 36회 분이 방송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도올만큼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도드물 것이다. 그분의 고전 해석에서부터 인품에까지 도올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길위의단상 2011.10.30

사진, 예술로 가는 길

사진에 관한 내 기본 인식을 바꿔준 책이 한정식 선생의 이다.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찍은지 30년이 넘었지만 사진이란 무엇인지, 사진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적이 없었다. 사진이란 그저 기록이나 기념으로 남기기 위해 찍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항상 그 수준이고 발전은 불가능했다. 책은 첫머리에서 '사진은 말이다'라는 명제로 시작한다. 사실 이 정의부터가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명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깊다는 걸 알 수 있다. 뒤에 나오는 '사진은 자연과 인생에 대한 자기 발언'이라는 것도 같은 뜻이다. 사진이 나의 말이고 발언이라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어떤 사진을 찍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게 될까를 연구하고 고민하게 되는 건 당..

읽고본느낌 2011.10.29

주산지 왕버들

주산지를 찾은 목적은 왕버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주산지에는 수령 100년 내외의 왕버들들이 자라고 있고, 이미 죽어버린 나무들도 있다. 전부 합하면 20그루 가까이 될 것 같다. 왕버들이 아무리 물을 좋아한다지만 저렇게 평생을 물 속에 잠겨 지낼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다. 이곳 왕버들은 물에 잠긴 모습이 주변 풍광과 어우러지면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전체를 찍어도 부분을 찍어도 모두 멋진 모델들이다. 그러나 일부 왕버들은 몇 해 전 태풍에 상한 흔적도 보인다. 근처에 있는 달기약수 부근의 천연기념물 왕버들을 찾아갔었는데 태풍 루사 때 떠내려갔다는 얘기를 듣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렇지만 하늘이 하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옛 것은 물러가고 새 것이빈 자리를 채우는 게 자연의 원리인 것을.

천년의나무 2011.10.29

단풍물 드는 주산지

망설이다가 결국 길을 나섰다. 몸살이 가시지 않은 몸이 무거웠다. 주산지(注山池),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고향집에서도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거리였다. 청송에 있는 주산지는 조선 숙종 때인 1720년에 축조되었다. 긴 쪽 길이가 200 m 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저수지다. 사진 찍는 사람들은 새벽녘 물안개 피는 주산지 풍경을 최고로 친다. 도착하니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1 km 정도 걸어들어가니 산 속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주산지가 곱게 화장을 하고 맞아주었다. 물에 잠긴 왕버들 고목들도 멋있었다. 주산지는 아담하면서 태고의 신비를 느껴볼 수 있는 저수지다. 계절이나 시간대마다 맛이 다 다를 것 같다. 자주 찾아보고 싶은 곳이다.

사진속일상 2011.10.29

법흥사 밤나무

영월 법흥사에 큰 밤나무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밤나무는 평창 운교리에 있는데 거의 400년 가까이 된 걸로 알고 있다. 법흥사 밤나무는 수령이 약 200년으로 추정하지만 크기로는 운교리 밤나무와 비슷할 것이다. 안내문에 보면 법흥사 밤나무의 키가 27 m로 나와 있다. 그러나 눈대중으로 봐도 그 높이에는 전혀 어림 없다. 많이 봐줘야 15 m 쯤 될 것이다. 사찰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수정해줬으면 좋겠다. 밤나무는 극락전 뒤 산비탈에 있다. 마침 노랗게 물든 잎이 주변 산색과 잘 어울렸다. 200살이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무척 건강해 보였다. 사람으로 치면 백수를 훨씬 넘긴 나이다. 200년이라면 수많은 사건이나 화마를 겪었을 터인데 꿋꿋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

천년의나무 2011.10.28

경북 북부지역 가을 여행

지난 주말(2011. 10. 22.), 경떠모 회원들과 경북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1박2일의 여행을 했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내성천 이야기'였다. 고향에 미리 내려와 있던 나는 풍기에서 다섯 명의 일행과 합류했다. 전날 저녁부터 내리던 비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풍기에서 갈비인삼탕으로 점심을 하고 순흥으로 이동해도호부 터를 찾았다. 옛 청사 자리에는 지금 순흥면사무소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옆에 관원들의 쉼터로 썼다는 정원이 일부 남아 있다. 연못을 파고 봉도각(逢島閣)이라는 정자도 세웠다. 그러나 지금 인간의 흔적들은 모두 사라졌고 노목들만이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오늘 같이 비 내리는 가을에 더욱 어울리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죽계천을 따라 피끝마을로 갔다. 1456년,..

사진속일상 2011.10.28

풍접초(2)

화려하게 성장(盛裝)을 한 여인네 같은 꽃, 풍접초. 바람 풍[風]과 나비 접[蝶]자를 쓰는 풍접초보다는 족두리꽃으로도 많이 불린다. 시집 가는 언니 머리 위에 얹힌 족두리를 닮았대서 붙여진 우리말 이름인 족두리꽃이 더 정감있게 들린다. 화려함 뒤에 숨어 있는 슬픔을 시인은 이렇게 읊었다. 이사 온 첫해 빌라의 화단에서 처음 그 꽃을 보았다 얼굴만 알고 지나치는 이웃집 여인처럼 매끈한 흰 얼굴에 이끌려 고개를 돌리게 하는 모르는 여인의 향기 나는 꽃 앞에 서서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들여다본다 합환주에 달아오르는 뺨 포르르 떨리는 족두리의 떨잠 다소곳이 고개 숙인 신부는 왜 슬퍼보이기만 할까 팔월에 곱게 피어 씨방엔 한철 꽃이 될 아가들 자랄 테고 구월이면 희고 붉은 꽃이삭은 떨어질 것인데 잔가시 잔뜩 세..

꽃들의향기 2011.10.20

방화동 느티나무

서울 강서구 방화동 일대는 옛 지명이 능말이었다. 오래전부터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김포에 있는 장능(원종왕능)이 이곳에 터를 잡으려 했다가 협소하여 자리를 바꾼 것에서 능말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는 400년 이상 능말과 함께 해 온 거목이다. 조선 중종 때의 정승 심정(沈貞)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안내판에 보면 느티나무의수령이 480 년, 은행나무는 435 년이라고 나와 있다. 키도 17 m인 느티나무가 11 m인 은행나무보다 더 높다. 그러나 줄기 둘레는 은행나무가 더 굵다. 느티나무가 형뻘이 되는 셈인데 오랜 세월을 이웃하며 변함없는 우정을 나누는 친구처럼 느껴지는 두 나무다. 두 고목 옆에는 나이가 어린 느티나무 두 그루가 함께 자라고 있어 한 가족 같이도 보인다. 주..

천년의나무 2011.10.20

강우근의 들꽃 이야기

는 꽃을 주제로 한 여느 책과는 다르다. 이분이 소개하는 꽃은 우리가 잡초라고 부르는 천덕꾸러기들이다. 꽃 자체는 볼 품이 없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은이는 보잘것 없는 잡초에서 세상을 바꾸는 희망을 읽는다. 들꽃에서 배우는 지혜가 책 가득 담겨있다. 짓밟혀도 굴복하지 않는 잡초에서 민중의 저항과 생명력을 읽는다. 본인은 어줍지 않게 들꽃 이야기를 썼다고 했지만 글을 읽다보면 내공이 대단한 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식물에 대한 지식만이 아니라 자연과 생명에 대한 애정을 함께 느끼고 공유할 수 있다. 들꽃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추출해 내는 지은이의 혜안이 부럽다.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는 없다. 주변에서 흔하지만 하찮게 취급하는 풀과 나무를 통해 사람과 사람의 삶을 본다. 귀화식물에서는 이주..

읽고본느낌 2011.10.19

우음도의 저녁

파도 소리가 소 우는 소리와 같았다는 우음도(牛音島), 경기도 화성에 있는 우음도는 이제 바다의 섬이 아니다. 시화방조제가 바닷물을 막으면서 육지 속의 섬이 되었고, 우음도 앞 바다는 너른 벌판으로 변했다. 풀씨들이 날아와 땅을 덮었고 군데군데 나무들도 저절로 자라났다. 사람이 둑을 막았지만 자연은 그 안에원시적인 풍경을 만들었다. 전 직장의 부원들과 저녁 때에 맞추어 우음도를 찾았다. 낮에는 제부도 바닷길을 걷고,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는 조개구이를 먹었다. 송산리 공룡알 화석지에서는 지층 속에서 드러난 1억 년 전의 공룡알도 보았다. 이곳은 머나먼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다. 우음도는 가을 저녁과 잘 어울리는 곳이다. 그러나 이심도 깊은 쓸쓸한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내기에는 역부..

사진속일상 2011.10.19

햇발국수나 말아볼까 / 고영

가늘고 고운 햇발이 내린다 햇발만 보면 자꾸 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 종일 들판을 헤집고 다니는 꼴을 보고 동네 어른들은 천둥벌거숭이 자식이라 흉을 볼 테지만 흥! 뭐 어때, 온몸에 햇발을 쬐며 누워 있다가 햇발 고운 가락을 가만가만 손가락으로 말아가다 보면 햇발이 국숫발 같다는 느낌, 일 년 내내 해만 뜨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면 그럼 모든 것이 타 죽어 죽도 밥도 먹지 못할 거라고 지나가는 참새들은 조잘거렸지만 흥! 뭐 어때, 장터에 나간 엄마의 언 볼도 말랑말랑 눈 덮인 아버지 무덤도 말랑말랑 감옥 간 큰형의 성질머리도 말랑말랑 내 잠지도 말랑말랑 그렇게 다들 모여 햇발국수 한 그릇씩 먹을 수만 있다면 눈밭에라도 나가 겨울이 되면 더 귀해지는 햇발국수를 손가락 마디마디 말아 온 세상 슬픔들에게 나눠줄 ..

시읽는기쁨 2011.10.18

광주 국수봉

천변에 나갔는데 앞산이 불러서 무작정 산에 들었다. 광주 국수봉이다. 국수봉(國守峰)은 광주 시내에서 경안천 너머 동쪽에 있는 해발 264 m의 야트막한 산이다. 광주 시내 어디에서나 보이고가장 가깝다. 이 산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이 청군에 포위되어 위급할 때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허완(許浣)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다 청군과 싸워 패한 곳이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민영 등 여러 장수들도 전사했다. 국수봉이 무슨 뜻인가 했더니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산이란 의미다. 국수봉 정상에서는 광주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광주를 둘러싸고 있는 산 중에서 이만큼 전망이 좋은데는 없을 것이다. 능선에만 올라서면 산길은 거의 평지 비슷하게 이어진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이런 아담한 산들이 여럿 ..

사진속일상 2011.10.17

장자[183]

겉으로 드러나는 사물은 믿을 것이 못 된다. 外物不可必 - 外物 1 '외물불가필(外物不可必)', 장자 외물편은 이렇게 시작된다. 외물(外物)이란 나 이외의 사물이나 현상들이다. 나와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는 모든 물질과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장자가 강조하는 외물은 명예나 부귀 등 인간이 집착하는 욕망의 대상을 말한다. 본문에서 '필(必)'은 '신(信)'으로 해석된다. 이어서 장자는 왜 외물이 믿을 것이 못 되는지 역사상의 인물들 예를 든다. 걸왕은 바른 말을 하던 용봉을 찢어 죽였고, 주왕은 비간의 몸에 일곱 개의 구멍을 내서 강물에 던졌고, 미친 척 하고 살던 기자마저 잡아죽였다. 간신 악래도 예외는 아니었다.부차에게 죽임을 당한 오운과 장홍도 마찬가지였다. 신하의 충성이 반드시 신뢰를..

삶의나침반 2011.10.17

상만리 비자나무

남쪽 지방에 가야 비자나무를 만날 수 있다. 자주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무의 생김새나 잎 모양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진도군 임회면 상만리에 있는 이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이곳은 절이 있던 자리였다는데 지금은 동네의 당산나무로 되었다. 주변이 깨끗이 정비되어 있고, 나무 아래에는 주민들이 쉴 수 있는 평상도 놓여 있다. 천연기념물이더라도 출입을 금지시키기보다는 이렇게 나무와 사람이 공존하는 모습이 훨씬 보기 좋다. 가까이 가서 보면 나무 줄기에서 수많은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다. 나이가 600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혈기 왕성한 모습이다. 나무 높이는9 m, 줄기 둘레는 5.6 m인 거목이다.

천년의나무 2011.10.16

개화산 약사사

서울 강서구 개화산에 있는 약사사(藥師寺)는 원래 이름이 개화사(開花寺)였다.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석탑이 있는 걸로 보아 꽤 오래된 절로 보인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의 '開花寺'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지금의 약사사를 한강 건너편에서 그린 것이다. 마침 전 직장 동료들과 개화산에 갈 기회가 생겨서 머리로 겸재의 그림을 떠올리며 약사사와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산이나 절의 모습은 그림과 많이 달랐고, 다만 삼층석탑은 그림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20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많이 변했을 법도 하다. 산세도 나무가 있고 없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림에서는 개화산 바로 아래로 한강이 흐르고 있는데 지금은 한강이 멀리 후퇴해 있다. 절밑에 버드나무와 밭이 보이..

사진속일상 2011.10.15

시험 감독을 한 어느 학부모의 소감

.... 일주일 전. 중간고사 시험 감독을 갔다. 3학년 한 줄, 1학년 한 줄 섞여 앉아 시험을 치렀다. 선생님은 교탁에, 그 대척점인 뒤 칠판 쪽에 내가 섰다. 종이 울리자 나란히 도열한 회색빛 등짝이 일제히 수그러진다. 푸코의 에 나오는 판옵티콘 구조, 일망감시체제에서 감시자의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게 됐다. 환절기라서 아이들이 코를 킁킁 거리고 기침을 해댔다. 다리를 떨고 몸을 비트느라 의자의 삐그덕거리는 쇳소리가 울렸다. 매캐한 사내냄새 자욱한 공간에 왠지 불길한 기운을 자아내는 음향효과들... 맨 뒷자리 덩치 큰 녀석은 뒷모습부터 남달랐다. ‘학교 싫어 공부 싫어 시험 싫어’를 온몸으로 발산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문이 빼곡한 영어 시험지를 받더니 앞뒤로 김을 굽듯이 두어 차례 뒤집어 훑고는..

길위의단상 2011.10.14

미국자리공

미국자리공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기 시작한다. 흰 꽃이 지고 나면 검은색의 구슬 같은 열매가 달린다. 독성이 있다고 하지만 모양은 무척 예쁘다. 미국자리공은 1950년대부터 번성하기 시작한 귀화식물이다. 아마 미국자리공만큼 미움을 많이 받았던 식물도 없을 것이다. 독이 있고 토양을 산성화 시킨다는 오명에 왕성한 번식력이 더해져 이 땅을 망치는 유해식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외래종이 번성할 여건을 마련해 준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 자연을 파괴하는 난개발은 바로 이런 외래종이 퍼져나가는 길을 만들어주는 것과 같다. 미국자리공이 울산 같은 공단 지역에서 제일 먼저 자리 잡았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정상적인 생태계라면 자생식물과의 경쟁에서 그들이 마음대로 활개를 칠 수는 없다. 미국쑥부쟁이..

꽃들의향기 2011.10.13

할아버지는 무엇을 했나요

아침 3시 23분 나의 귀한 손자 손녀들이 나를 자도록 내버려 두지 않아 잠에서 깬다. 나의 귀한 손자 손녀들이 꿈속에서 내게 질문을 한다. 지구가 약탈당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무엇을 했나요? 지구가 위태로울 때 할아버지는 무엇을 했나요? 계절이 바뀌지 못할 때 포유동물, 파충류, 새들이 모두 죽어갈 때 할아버지는 정말 무엇을 했나요? 민주주의가 짓밟힐 때 할아버지는 거리에서 저항했나요? 이전에 알고 있었을 때 할아버지는 무엇을 했나요? 이라는 책을 보다가 이 시를 만나 뜨끔했다. 생각과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는 걸 알지만 실천하지는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강이 죽어가고, 정의가 짓밟히고, 지구가 약탈당할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먼 훗날 내 사랑스런 손자 손녀들이 “그때 할아버지는 무엇을..

참살이의꿈 2011.10.13

때밀이 아줌마는 금방 눈에 뜨인다 / 양애경

때밀이 아줌마는 때를 밀고 있지 않을 때도 금방 눈에 뜨인다 온통 벌거벗은 여자들 속에서 검거나 빨간 비키니를 입고 있기 때문일까 안 쓰는 대야를 걷어다 한쪽에 치우고 있거나 좁은 침대에 벗은 여자를 누이고 땀을 흘리며 문지르고 있을 때도 때밀이 아줌마는 다른 여자들과 어딘지 달라 보인다 처음에는 때밀이 아줌마가 아니라 침대에 누워 때를 밀게 하는 여자들이 더 눈에 뜨였다 만삭의 임산부나 시들어 조그매진 할머니가 누워 있으면 마음이 놓였지만 좁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왜소한 때밀이 아줌마에게 살집 피둥한 몸을 맡기고 있는 여자들을 보면 ‘게으르기도 해라. 제 몸의 때도 제 손으로 못 미나.’ 살짝 끓는 물에 튀겨져 털을 밀고 있는 하얀 돼지 같기도 하고 잔돈푼에 노예를 산 거만한 마나님 같기도 하고 게다가..

시읽는기쁨 2011.10.12

광주 무갑산

광주의 산 답사 다섯 번째는 무갑산을 찾았다. 무갑산(武甲山)은 높이가 578m로 광주에 있는 산치고는 높은 편에 속한다. 또한 외지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산이 아닐까 싶다. 무갑산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산세가 갑옷을 입은 무사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설과, 임진왜란 때 무인들이 항복을 거부하고 이 산에 숨어들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산행 들머리는 무갑사(武甲寺)로 했다. 절 옆으로 등산로가 시작된다. 조금 걸어 들어가면 이내 경사가 급해져 숨이 가빠진다. 정상까지 이르는 길은 짧지만 대신 경사가 급하다. 아내와 동행했는데 유람하듯 걸어서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정상에서는 나무들 키가 낮아 사방으로 조망이 훤했다. 그러나 시야가 좋지 않아 멀리까지 보이지는 않았다. 요사이는 아침에 일어나면..

사진속일상 2011.10.11

광한루원 팽나무

광한루원에는 오래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있다. 조선 명종 재위 무렵(1558년)에 심어졌다고 하니 수령이 450년이 된 고목이다. 원래는 '남산관' 마당의 정원수로 있었는데 광한루원을 조성하면서 이곳으로 옮겨 심었다고 한다. 나무는 높이가 18 m, 가슴 둘레가 3.7 m 정도 되는데,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모양이 멋지다. 400살이 넘는 나이임에도 건강하고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다.

천년의나무 2011.10.10

광한루원 왕버들

광한루원(廣寒樓苑)에는 호수를 따라 멋진 왕버들 고목들이 분위기를 더해준다. 광한루원과 버드나무는 서로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왕버들 중에는 수령이 400년이 넘는 것도 있다. 광한루(廣寒樓)는 1419년 경에 황희 정승이 세웠다고 한다. 처음 이름은 광통루(廣通樓)였다. 연못을 만들고 나무를 심은 건 1582년 경이었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 이때 세 개의 섬을 만들고 배롱나무,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왕버들도 아마 이때 쯤 심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한루원은 전각과 연못, 나무가 잘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그 중심에 왕버들이 있다.

천년의나무 2011.10.10

장자[182]

소지가 물었다. “사방 육합에서 만물이 생기는 작용이 어째서 일어날까요?” 대공조가 답했다. “음양이 서로 비춰주고 덮어주고 바로잡아 주기 때문이다. 계절은 서로 갈마들고 서로 낳고 서로 죽인다. 욕심과 미움, 나아가고 물러남이 이로써 의탁하여 일어나고, 자웅이 쪼개지고 이로써 변함없이 보존되는 것이다. 안위가 서로 바뀌고 화복이 서로 낳고 완급이 서로 갈마들고 취산이 이루어지니 이로써 명칭과 실재가 회통할 수 있고 정기와 묘용이 뜻을 펴는 것이다. 질서를 따라 서로를 다스리고 운행을 의탁하여 서로를 사역하니 막히면 근본으로 돌아가고 끝나면 시작된다. 이것이 만물이 보존되는 현상이다.” 少知曰 四方之內 六合之裏 萬物之所生惡起 大公調曰 陰陽相照 相蓋相治 四時相代 相生相殺 欲惡去就 於是橋起 雌雄片合 於是庸有..

삶의나침반 2011.10.09

광주 백마산

경기도 광주의백마산(白馬山)은 광주시 초월읍과 오포읍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에 있다. 해발 463 m의 아담한 산이다. 남쪽으로는 용마봉, 발리봉, 노고봉, 마구산을 지나 태화산까지 이어진다. 백마산에서 태화산까지 종주하는데는 8시간이 넘게 걸린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백마산 등산 들머리 중 하나인 초월읍사무소에 닿는다. 처음 가는 터라읍사무소 오른쪽으로 난 큰 골목길을 따라 주택가를 지나서 진새골로 접어들었다. 계속 올라가면 산행 기점이 나오는데 중간에 몇 번이나 산으로 들었다가 되돌아나오기를 반복했다. 안내 표시가 없어 30분 넘게 헤매고 다니다 겨우 산에 드는 길을 찾았다. 산은 높지 않지만 봉우리들 사이의 오르내림이 심해서 쉬운 길은 아니었다. 백마산 정상에는 작은 표지석 하..

사진속일상 2011.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