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정상적인 삶의 목록

샌. 2009. 11. 25. 10:42

‘슈퍼클래스’는 위너 중의 위너다. 그들은 돈과 권력을 함께 가지고 있다. 코엘료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무대 위에서 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지 결정하는 사람,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너무나 잘 알기에 외모 따위엔 신경 쓸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 자신이 세상에서 최고의 특권을 누리고 만인의 선망을 받고 있다고 믿는 꼭두각시들의 줄을 당기는 사람, 그 줄을 어느 날 싹둑 잘라버려 꼭두각시들이 생명과 힘을 잃고 굴러 떨어지게 만드는 사람’이다.


코엘료의 신작 소설 ‘승자는 혼자다’[The Winner Stands Alone]는 그런 슈퍼클래스들과 슈퍼클래스의 명성과 권력을 얻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치 마약중독자들이 마약을 찾듯 그들은 오직 성공만을 위해 달려 나간다. 코엘료가 그리려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 뒤에 숨은 추악한 인간의 욕망과 슈퍼클래스들의 공허한 내면인 것 같다. 그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그러나 욕망 충족을 위해 치닫는 우리의 모습 또한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각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산다고 하지만 현대 사회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한 부속품으로서 그 무언가에 의한 조종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인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역시 줄에 매달린 가련한 꼭두각시에 불과할 뿐이다.


소설의 배경은 칸 영화제가 열리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다. 러시아의 억만장자며 이동통신 회사의 회장으로 슈퍼클래스인 이고르는 떠나간 부인을 되찾기 위해 연쇄 살인을 저지른다.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다시 붙잡을 수 있다면 살인조차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무 명분도 없는 그런 폭력성을 통해 슈퍼클래스의 비인간성을 드러내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또한 난폭한 현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소설의 내용 중에 ‘정상적인 삶의 목록’이란 게 있다. 이고르에 살해당한 어느 영화배급업자의 수첩에 적혀 있는 내용인데 읽어볼수록 씁쓰름해진다.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 많을수록 세상을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세상이 되었다.


<정상적인 삶의 목록 >


1. 우리가 누구이고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잊게 하는 모든 것. 그것 때문에 우리는 생산하고 또 생산하며 돈을 벌기 위해 일에만 열중한다.

2. 전쟁을 벌이기 위해 규칙을 만드는 것(이를테면 제네바 협정).

3. 대학에서 수년간 힘들여 공부한 다음 백수가 되는 것.

4. 30년 후에 은퇴하기 위해, 아무 재미도 없는 일을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는 것.

5. 은퇴한 다음 여생을 즐길 힘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몇 년 후에 권태 속에 죽어가는 것.


6. 보톡스 주사를 맞는 것.

7. 행복보다 돈이, 돈보다 권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8. 돈보다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을 ‘야망 없는 인간’으로 취급하며 비웃는 것.

9. 자동차, 집, 복장 따위를 서로 비교하는 것. 산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려 하지 않고, 이런 비교의 결과로 생을 규정하는 것.

10. 낯선 사람에게 절대로 말을 걸지 않는 것. 이웃에 대해 험담하는 것.


11. 부모는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

12.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 것. 그리고 아이들을 핑계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같이 사는 것(부부들이 지겹도록 싸울 때는 아이들이 옆에 있지도 않다는 듯이).

13. 다르게 살아보려 하는 사람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

14. 침대 옆 신경질적인 알람시계에 맞춰 잠에서 깨어나는 것.

15. 인쇄된 것이라면 무조건 믿는 것.


16. 실제 기능은 전혀 없지만 ‘넥타이’라는 엄숙한 이름을 가진 색깔 있는 직물 띠를 목에 걸고 다니는 것.

17. 직설적인 질문은 절대 하지 않는 것. 내가 정작 알고 싶어 하는 게 뭔지 상대가 뻔히 짐작하고 있다 해도.

18.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것.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사람들을 딱하게 여기는 것.

19. 예술이란 부의 가치가 있거나 아니면 아무 가치도 없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

20. 쉽게 얻어진 거라면 모두 경시하는 것. 희생 없이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가치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21. 우스꽝스럽고 불편해도 유행을 따르는 것.

22. 유명한 사람은 모두 집에다 억만금을 쌓아놓고 있으리라 믿는 것.

23. 외적인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돈과 시간을 투자하면서도, 내면의 아름다움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

24.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척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것.

25.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행여 유혹하려 한다고 오해받을까봐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는 것.


26.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문을 향해 서 있는 것. 그 안에 사람이 꽉 차 있더라도 마치 혼자인 것처럼 느끼면서.

27.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레스토랑에서는 절대 큰소리로 웃지 않는 것.

28. 북반구에서 항상 계절에 맞는 옷을 입는 것. 봄에는 팔을 드러내는 옷을 입어야 하고(추워도 할 수 없지), 가을에는 모직 조끼를 입고(더워도 어쩔 수 없고).

29. 남반구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흰 솜뭉치로 장식하는 것. 예수의 탄생과 겨울은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30. 나이를 먹으면서 자기가 세상의 모든 지혜를 알게 됐다고 믿는 것.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을 만큼 깊이 있는 삶을 살지도 못했으면서.


31. 자선파티에 한 번 나간 다음, 세상의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자기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것.

32. 배가 고프든 안 고프든 하루 세 끼를 꼭 챙겨먹는 것.

33. 다른 사람이 모든 점에서 나보다 낫다고, 더 잘생겼고, 더 유능하고, 더 부유하고, 더 똑똑하다고 믿는 것.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뭔가 시도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

34. 자동차를 마치 무적의 갑옷이나 무기인 양 사용하는 것.

35. 운전하면서 욕설을 퍼붓는 것.


36. 제 자식이 잘못을 저지른 이유는 모두 아이가 사귀는 친구 탓이라 생각하는 것.

37. 사회적 지위와 명망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 누구와도 결혼하는 것. 사랑은 그 다음 문제.

38. 아무것도 시도해본 게 없으면서 항상 ‘시도해봤다’고 말하는 것.

39. 인생의 가장 흥미로운 것을 아무 기력도 남지 않을 먼 훗날로 미루는 것.

40. TV라는 마약을 매일 엄청나게 복용하면서 우울함을 잊으려고 하는 것.


41. 자신이 얻은 모든 것들에 대해 자신할 수 있다고 믿는 것.

42. 여자들은 축구를 싫어하고 남자들은 장식과 요리를 싫어한다고 믿는 것.

43. 모든 문제를 정부 탓으로 돌리는 것.

44. 선하고 점잖고 존경할 만할 사람이 되는 것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힘없고 나약하고 만만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라고 믿는 것.

45. 타인에 대한 공격성과 무례함을 ‘강한 개성’의 동의어라고 믿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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