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펌] 독일에서 진보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나

샌. 2009. 10. 31. 10:26

‘진보는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 보수는 뭐, 고장 난 것 고치는 사람인가?’ 정도였지요. 한국에 살던 서른네 살까지의 나였습니다. 처절한 입시의 지옥을 통과하여 대학이라는 곳을, 그것도 데모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미니스커트 위로 빨간 입술에 은빛 귀걸이 찰랑이며 노트 하나 살짝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여학생이 허름한 잠바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독재타도’를 외치던 전투적인 그녀들보다는 좋았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사사건건 사회의 비리를 들추며 이 사회를 쓰레기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불편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냐? 저 사람은 열등감이 많아서 그런가?’라며 나름대로 체제에 순응하며 양처럼 순하게 살았습니다. 그럴듯한 신문지상에 올라오는 기사나 논평을 보면서 사회를 비판하는 자들은 그 사회의 열등한 인물들, 사회의 비리를 들추는 자들은 무엇인가 사상이 근본부터 배배꼬인 뒤틀린 인간들이라고 그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순진하게 믿었던 청춘이었지요. 저의 20대와 30대는.


그러다가 독일에 왔습니다. 파랗게 세뇌된 내 시야에 들어온 이들의 행위 하나하나는 처음엔 내게 정말 생소하고 이해할 수 없어 불쾌하기까지 했습니다. 내가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들, 학교에서 배웠고 신문에서 가르쳐주었던 진실들이 하나하나 거짓임이 드러나면서 아이 하나 딸린 이 아줌마의 머릿속에서는 뒤늦게 격렬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기만 하는 진보란 무엇일까?’ 나도 모르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독일에 오니 그 빨갱이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것이었습니다. 개 끌고 공원 산책로를 지나가는 할머니의 입에서도 좌빨들의 입에서나 오르내리는 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빨간 물이 든 좌익진보들의 사상이 특별한 것이 아니었구나.’ 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진실들을 우리는 왜 별종취급 했던 것일까요. 지금도 우리 사회는 그들을 왼쪽으로만 몰아가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그런 글들을 읽게 되면 그저 웃습니다. 그러다가 글을 쓰니 나도 모르던 의식들이 송곳처럼 들고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 블로그에는 좌파들이 기어들어온다.’는 어떤 고리타분한 분의 지적까지 받게 되는 것을 보면.^^


그러나 저는 본래 순진무구한 애 딸린 아줌마입니다. 내 생각들은 불온서적을 탐독해서 얻은 것도 아니고, 친구를 잘못만나 근묵자흑이 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민족주의는 범죄다.’ 독일에서는 역전에 앉아 구걸하는 걸인의 입에서도 쉽게 흘러나오는 말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책 좀 읽었다는 가방끈들만 표현할 수 있는 폼 나는 사상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선 개나 소나 모두 그렇게 이야기 하더군요. 애국을 부르짖는 무리들은 우리와는 정 반대로 이 사회의 낙오자나 사회 부적응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무식한 아줌마라도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알고 있었던 교육, 최고로 생각하고 자랑스러워했던 교육이 여기 오니 부끄러워졌습니다. 처음엔 이들의 우매함을 일깨워 주기라도 하려는 듯 잘난 척을 일삼으며 공부가 최고인 교육을 받은 내 생각들을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지요. 허구한 날 놀기만 하는 독일 아이들이 정말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운동선수가 될 것도 아니면서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미친 듯이 스포츠클럽을 찾아다니는 아이들이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가 없더라고요. 툭하면 밴드를 조직해서 영양가 없이 음악 한다고 싸돌아다니는 청소년들을 비웃곤 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학교와 집만 오가던 소녀시절 나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 지난날의 나에게 ‘그래서 행복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과연 나는 행복했을까요? 그 질문에 대답할 필요도 없이 피사에서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하는 독일 아이들이 사는 모습을 보니 정말 행복해 보였습니다. 한창 꿈 많은 청춘답게 해볼 것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이들이 달달 외운 지식이 부족하다고 해서 결코 우리보다 불행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요? 이들의 여유 있는 삶을 볼 때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곤 합니다.


바로 우리가 말하는 진보들의 생각이 여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회는 분명 잘못된 집단입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는 진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들의 주장을 응원합니다.^^

 

- from '독일교육 이야기'(http://blog.daum.net/pssyy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