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촌놈

샌. 2009. 10. 28. 10:56

이웃 블로그에서 '촌놈'에 관한 짧은 글을 흥미있게 읽었다. 은희경의 소설 '비밀과 거짓말'에 나오는 대목이라고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문득 어느 지인의 얼굴이 떠올랐는데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나 정도의 문제지 촌놈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나라고 예외가 아니다. 나는 아니라고하지만 자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문 법이다.

 

촌놈을 좋아할 사람은 적겠지만 소시민으로서의 촌놈은 남에게 그다지 큰 피해를 끼치지는 않는다.예를 들면 촌놈이 종교를 가지면 광신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정도다. 싫으면 피하면 된다. 문제는 촌놈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점이다. 촌놈 되기를 부추기는 풍조가 되면 아예 망조가 든 나라다. 촌놈들에 의해 어떤 촌놈은 영웅으로 추앙 받기도 한다.

 

원래 '촌놈'이나 '촌스럽다'는 모습이나 행동거지가 세련되지 못함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전국이 도시화된 지금은 물리적 의미로서의 촌놈이라는 말은 사라지고 있다. 대신 정신적이거나 의식적인 면에서의 촌놈인데, 이 촌놈은 속물과는 뉘앙스가 또 다르다. 촌놈이나 속물이나 인간의 기질적인 측면이 크기 때문에 이들은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성장할 때의 의식 형성 과정이 중요한 것도 물론이다. 촌놈들은 대개 자의식이 결핍되어 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이 배우거나 나이가 들어도, 또는 높은 자리에 앉아도 촌놈 기질은 별로 변하지 않는 것 같다.

 

 

< 은희경의'촌놈론' >

 

촌놈들은 대개 새롭다거나 특이한 것에 약하다. 이것저것 많은 일에 호기심과 흥미를 갖지만 그것들끼리는 아무 계통도 일관성도 없다. 감탄도 쉽게 하지만 실망하는 것도 금방이다. 사람 모여 있는 곳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고 귀가 얇아 필요 없는 물건을 잘 산다. 자신은 언제나 부정하지만 고속도로 휴게소의 호객꾼이나 신비의 정력제 따위를 파는 약장수에게 백퍼센트 성공을 보장하는 표적이 된다. 또한 뭔가에 빠져있을 때는 그것을 자랑하는 것으로는 모자라 남들까지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하는 것이 촌놈이다. 밤늦게 술자리로 사람을 불러내는 단순한 방법으로 우정을 시험하는가 하면, 특히 여자 앞에서는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들켜버리는 조울증 환자다. 뭐든 한 가지를 알았다 싶으면 곧바로 전파에 나서는데 거기에 대해서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전문가가 그 자리에 있을지 모른다는 조심성을 갖추거나 또는 그 문제에 관심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눈치를 채기에는 성격이 너무나도 순수하고 대범하다. 안목은 전혀 없으면서도 어느 자리에서나 자기 취향을 뚜렷이 내세우는 근거 없는 자신감 역시 촌놈들만의 호연지기이다. 그처럼 언제나 자신의 의견을 앞세우고 우기는 게 특기이지만 반대로 남의 진지한 의견이라면 굳이 귀담아 듣는 법이 없다.


자신이 잘 모르거나 장악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은 또한 촌놈들의 장점이다. 세상일 모두가 자신이 잘 아는 것과 알 필요 없는 것으로 나뉘므로 늘 큰소리칠 수 있는 것이다. 내기를 좋아하지 않는 촌놈은 거의 없다. 지게 되면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지만 얼마 안 가 다른 분야의 공부를 한 뒤에 같은 상대에게 다른 내기를 제안하는 걸 보면 한번 생긴 오기는 끝까지 챙긴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람을 판단하거나 물건을 고를 때는 예외 없이 즉흥적이고 감정적인데 자신이 기분파라는 것을 굳이 부정하지도 않는다. 결정적으로 촌놈들은 순정과 목숨이 여러 개이다. 걸핏하면 순정뿐이고 시도 때도 없이 목숨을 건다. 맹목적이고 치열할 때 세상 모두를 짊어진 촌놈들의 허세는 눈물겹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세상과 부분적으로만 접촉하고 있다. 이 우물에서 저 우물로 뛰어 돌아다니며 올려다본 하늘이 전부일 뿐 촌놈이라는 개구리들은 바닷가에서 광대무변을 본 적도 없고 해발 이천 미터에서 발밑을 내려다본 적도 없다. 차라리 우물 밖에 연연해하지 않는 묵묵한 촌놈들은 바뀔 수 있지만 좁은 우물을 통해 하늘을 모두 보았다고 자신만만해하는 촌놈들은 끝까지 촌놈이다. 촌놈이 되고 안 되고는 어느 공간에서 자랐는가가 아니라 어떤 자각을 갖고 성장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 촌놈들한테는 영어하고 주제파악이 제일 어려운 과목이란 거 아시죠? 촌놈들은 절대 자기를 객관화시키지 못해요. 내가 저 사람 눈에 어떻게 비쳐질까, 그렇게 소심하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촌놈질 해먹겠어요. 출세한 촌놈 개구리들한테 올챙이 한번 데려가 보세요. 걔들, 올챙이 얼굴 절대 못 알아본다니까요. 촌놈들, 목숨 걸고 우기다가도 한순간에 뒤통수친다는 거 아시죠? 하긴 그것밖에 살길이 없으니까요. 알고 보면 불쌍한 놈들이에요. 한 가지에만 목매달지 말고 미리 여기저기 걸쳐놓으면 그중 하나는 걸리겠죠. 하지만 그런 짓은 절대 못 해요. 그러니까 여자가 싫다고 하면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 하죠. 질질 짜면서 옷소매 붙잡고 늘어지는 간 큰 짓을 하는 거예요. 가진 거라고는 대책 없는 순정뿐이라면서,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아주 큰소리까지 쳐요. 감독님, 여자들은요 촌놈 싫어해요. 다들 감독님처럼 쿨한 남자만 좋아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