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사나? 살라고 태어났기 때문에 산다. 어떻게 살면 좋을까? 행복하게 살면 된다. 이것이 나의 인생철학의 전부다.
어떻게 살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요리책을 보면 팔보채나 탕수육을 어떻게 만들라고 샅샅이 조리법을 말해준다. 행복을 만드는 요리책은 없을까? 러셀의'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이 내 머리에 떠오른다.
내가 어렸을 때 퍽 재미있고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에 하나다. 그 책에는 건전하고 쓸모 있는 충고가 담겨져 있다.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은 모든 행복론과 같이 너무도 일반적이다. 이 책들은 마치 팔보채가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이라고 지적하면서도, 팔보채를 만들려면 어떤 채소가 얼마쯤 들고, 어떤 조미료가 필요하고 언제 어떻게 얼마 동안 이것들을 지지고 볶고 데치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 식성, 내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내가 채소를 어떻게 지지고 볶고 데치는지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다.
사람은 저마다 식성이 다르다. 나는 맵고 짠 음식을 좋아한다. 궁중전골보다는 김치찌개를 더 좋아한다. 그 이유는 생리적인 것보다 내 몸에 영양분이 부족해서 내가 짠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매운 것을 안 먹으면 나의 뇌세포가 가열되지 않아 사고기능이 마비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내 체질, 내 성향, 내 식성, 내 편견에 알맞은 행복 요리법을 모색해봤다.
첫째, 나는 자명종을 틀어놓지 않는다. 나는 잠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는 열두 시간, 고등학교 때는 열한 시간씩 매일 잠을 잤다. 진갑을 치르고도 나는 요즘 열 시간씩 잠을 잔다. 이렇게 잠을 자지 않으면 나는 신체적으로 고통을 견뎌낼 수 없다. 의사 선생 말에 의하면 나는 위험할 정도로 저혈압이라고 한다. 이런 체질의 소유자로서 자명종을 틀어놓고 잔다는 것은 내 몸에 대해 무서운 범죄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나는 학교 다닐 때 여러 번 지각을 했었고 회사 출근을 한두 시간 늦게 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변명을 했다. “낙제는 하지 않겠습니다.” 또는 “대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나의 괴팍함을 이해하고 용서해준다. 언젠가 비행기를 놓쳤다. 사장이 벌컥 화를 내서, 나는 “내일 비행기가 있다고 합니다.” 하며 씩 웃고 도망쳤다.
나는 결혼 첫날밤에도 마치 점호나팔을 들은 듯 밤 아홉 시에 취침, 아침 일곱 시에 기상했다. 아내는 내가 병신인가 아니면 수면병 환자인가 하고 매우 걱정했다. 친구들을 저녁에 초대해도, 나는 아홉 시가 되면 “전 피곤해서 자야 되겠습니다. 아내와 재미있게 얘기하고 놀다 가십시오.” 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친구들이 노여워하며 입에 거품을 뿜으며 핏대를 올리고 손톱까지 빨개졌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궁극에는 그들도 나의 괴팍성을 이해했다. 입센의 로라 같이 나는 남에 대한 의무보다도 나 스스로에 대한 의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말의 가장 큰 즐거움은 낮잠을 두 시간씩 자고 나서 찬물을 한 사발 들이켜는 데 있다.
둘째, 나는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대로 먹는다. 요즘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에서 어떤 음식은 먹고 어떤 음식은 먹지 말라고 북새통이다. 노기, 새우, 순대를 먹으면 콜레스테롤이 높아져서 심장마비의 기습을 당할 수 있고 케이크,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뚱뚱해져서 식인종에게 잡혀 먹힐 염려가 있다고 한다. 당근을 먹으면 눈이 좋아지고 오렌지즙을 마시면 감기가 오지 않고 콩을 먹으면 머리가 좋아지고 우유를 마시면 키가 커진다고 한다. 생선과 과일, 섬유질 음식을 많이 먹으라고 한다. 소금과 지방질은 치명적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왜 삼겹살에 소금을 산더미같이 부어야 음식이 맛있을까?
나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내 입에 당기는 음식은 내 몸, 내 건강에 맞는 음식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나는 음식을 선택하는 데 있어 머리의 말을 듣기보다는 혀와 밥통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나는 눈이 아플 때 산부인과를 찾아가지 않고 안과를 찾아가듯, 수학문제를 풀 때는 뇌의 힘을 빌리되 음식을 가릴 때는 혀와 밥통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상식이라고 본다.
어떤 아프리카 사람들은 소금덩어리를 과자같이 씹어 먹는다. 알고 보니 그 지방 사람들은 염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미국 어머니들은 아이에게 “야, 이거 먹어. 몸에 좋아.” 하지만 프랑스 어머니는 “야, 이거 먹어봐. 맛있어.” 한다. 사는 재미중에 먹는 재미가 제일 크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 사람들은 매우 건실하고 자연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본다. 그렇다고 그들이 더 뚱뚱해지고 심장마비로 더 많이 죽는 것도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덴마크 사람들은 케이크와 돼지비계를 정신없이 먹어댄다. 그럼에도 그들 대부분은 날씬하고 오래 산다.
셋째, 나는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넥타이는 서양문명의 수치며 비극이다. 넥타이는 특별한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멋으로 맨다. 신사복 소매 뒤에 멋을 위해 전혀 쓸모없는 단추를 두세 개 다는데, 이런 멋은 몸에 해롭지 않으므로 관계없다. 그러나 넥타이를 맨다는 것은 마치 새끼로 목을 졸라매는 것 같다. 숨쉬기 힘들게 하고 피가 흐르는 것을 막는다.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고 미친 것이다.
옛날에 막 대학을 졸업하고 팩트론이란 회사에 입사원서를 내고 인터뷰를 했다. 나는 인사과장에게 종업원이 넥타이를 매는 것을 요구하느냐, 넥타이를 꼭 매야 한다면 나는 그 회사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고 미리 얘기했다. 인사과장은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다음 순간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치면서 그는 원서를 들고 사장 방으로 들어갔다. 이어 그 방에서 웃음소리가 한바탕 쏟아져 나왔다. 사장은 자기가 매고 있던 넥타이를 얼른 풀고 두 손으로 나를 반기면서 나의 씩씩한 태도가 좋다면서 그 자리에서 나를 채용했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산다는 것이다. 나는 옷을 고를 때 편안한 것에 기준을 둔다. 나의 와이셔츠와 바지는 공기 소통을 위주로 골라서 헐렁헐렁하다. 친구들이 나를 '핫바지'라고 부른다. 신발도 마찬가지로 편한 신을 택한다. 편한 신발을 한 켤레 사면, 나는 그것을 깁고 수선하며 몇 해씩 신는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옷과 신은 몸에 편해야 되고 몸에 편해야 마음이 편하다. 이런 원칙에서 나는 옷을 홀랑 벗고 잔다. 편하고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파자마를 입는 습관이 언제 생겼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옛날 변소가 십 리 밖에 있고 요강이 미처 발명되지 않았을 때 추운 고장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파자마는 사는 맛을 깬다. 소크라테스는 심사되지 않은 인생은 인생이 아니라고 사자같이 포효했지만, 나는 편하지 않고 멋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고 고양이같이 야옹하고 싶다.
나는 목욕을 자주 하는 것마저 꺼린다. 목욕을 너무 안 해서 몸에서 냄새가 나고 수시로 등허리를 긁어야 할 정도라면 물론 이것은 건강에 좋지 않다. 그러나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샤워를 한다는 것은 얼빠진 짓이다. 목욕을 너무 자주 하면 몸에 해롭다. 개를 키워 본 사람은 누구나 알지만, 개에게 목욕을 자주 시키면 개가 병들어 죽는다. 그 이유는 피부보호를 위하여 피부세포가 자연적으로 분비하는 기름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목욕을 자주 하면 감기도 곧잘 오지만 사타구니나 겨드랑이 같은 곳에 곰팡이가 생긴다. 비누를 사는 대신 옥수수 등긁개를 사서 등이 가려울 때 신나게 등을 긁어대는 것이 어떨까? 건강에도 좋지만 가려운 곳을 긁을 때 우리가 느끼는 미칠 듯이 즐거운 감각은 사는 즐거움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사람이 행복하자면 게을러야 한다. 미국 사람들의 가장 큰 결함은 항상 바쁘다는 것이다. 팬티를 입을 때 두 다리를 한꺼번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논리를 이해할 수 없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밥먹고 싶을 때 밥 먹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잠자고 싶을 때 잠자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즐겁고 고상한 짓일까. 나태는 몸의 피로를 덜어주고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사학자 윌 듀란트는 '항상 바쁜 사람은 문명인이 채 못된다.'라고 했다. 나태는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는 한에서 누구나 길러야 할 미덕이다.
이 행복론을 쓰면서 나는 내 이론이 설사 옳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한국 독자들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명종을 틀어놓지 말아야 되느냐, 파자마를 입지 말아야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요는 내 생리, 내 식성, 내 성향에 맞는 생활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있다. 요는 내가 나의 괴팍성으로 인해서 이웃 사람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고 사회질서를 교란시키지 않는 한에서 편하고 즐거운 길을 택하라는 것이다.
희랍 예지의 유산에 '너 자신을 알라.'와 '분수를 가릴 줄 알라.'는 명언이 있다. 그 누구보다도 건전한 상식을 가진 아리스토텔레스는 삶의 목적은 행복에 있다고 했다. 서머셋 모옴은 행복의 관건은 골목길에 순경이 서 있나 없나를 살펴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데 있다고 했다.
얼마 전 배우 도날드 서덜랜드의 전기를 텔레비전에서 봤다. 서덜랜드는 유명한 배우다. 그의 아들 키퍼도 유명한 배우가 되었다. 성공의 배경을 묻자, 키퍼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얘기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같이 낚시를 하러 갔었다. 어떻게 하면 고기를 낚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아버지가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한다.
'물을 알고, 고기를 알고, 낚싯줄을 알고, 미끼를 알아라. 그러면 누구나 고기를 잡을 수 있다.(Learn the water, learn the fish, learn the line, learn the bail. Then, everything coiltake carve of itself).'
참으로 멋있고 훌륭한 충고다. 행복한 삶은 단순한 삶이다. 주어진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알고 이를 추종한다는 것이 행복이라고 나는 믿는다.
- 전시륜 저 '유쾌한 행복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