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누가 바리사이인가?

샌. 2009. 4. 23. 09:47

예수 당시 이스라엘에는 여러 개의 유대교 분파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가 민중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사두가이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로마와 결탁하여 민중의 원성을 받았다. 반면에 바리사이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걱정하며 유대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성서의 율법을 지키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자 노력했고 회당의 지도자와 율법학자로서민중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 외에도 비록 소수지만 신비적이고 금욕적인 에세네파가 있었다. 그들은 은둔생활을 하며 자신들만의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예수가 세례를 받았던 요한도 에세네파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연구도 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예수는 바라사이를 거의 증오라고 해야 할 정도로미워했다. 예수가 다툰 많은 부분이 바리사이와 관계가 있고, 예수는"독사의 자식들!"이라며 그들의 위선을 비난했다. 바리사이에 대한 변명 같지만 위선이라는 말은 이상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해당되지도 않는다. 위선이란 고결한 이상과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생기기때문이다. 아마 당시의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가장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이형식적인 정결례와 율법 준수로 나타나고, 조상의 전통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업신여겼는지도 모른다.

예수가 싫어한 것은 적당히 존경을 받고 적당히 순수한 척 하면서 - 물론 본인들은 그렇게 느끼지 못하지만 - 결국은 자신들이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공범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악한 지배층의 잘못은 누구에게나 보이므로 비난하기도 쉽다. 그러나 적당히 악과 거리를 두는 척 하면서 민중들의 신뢰를 받지만 결국은 악의 체제에 대한 저항력을 약화시키는바리사이의 정체를 예수는 꿰뚫어 보았던것 같다. 예수와 바리사이의 갈등이 단순한 종교적 관점의 차이에 따른 다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번에 김규항 님의 '예수전'을 읽으며 바리사이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었다. 당시의 바리사이가 사악한 위선자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성경의 가르침을 지키고 따르려고 애쓴 사람들이다.그러나 예수로부터는 심한 비난을 받고 늘 갈등 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이었다.또한 예수의 눈에는 민중 의식의 변화를 가로막는, 어떤 면에서는 악의 체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을 향한 예수의 미움은 이런 점에서 이해될 수도 있음을 배웠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바리사이는 과연 누구일까? 이 부분에서는 님의 글을 인용해야겠는데, 이 글을 읽으며 나는 낯이 화끈저릴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며, 안정된, 그러나 거부감이 들 만큼은 아닌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며,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진 '양심적인 시민들'이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과 짐짓 긴장과 갈등을 벌이며, 늘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야만 하는 대다수 인민들과는 달리 시민으로서 양식을 충분히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스스로 그런 변화를 위한 노력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노력은 대개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 현실의 외피를 덜 추악하게 만드는 일에 머문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의 근본적인 변화를 좇는 모든 노력들을 '비현실적'이라고 냉소한다. 그들은 'NGO' '시민운동' '개혁운동', 그리고 '실현 가능한 진보' '최소한의 양식의 회복' 따위 간판과 표어를 걸고 활동한다. 인민들은 탐욕스럽고 불의한 지배세력을 혐오하지만 양식과 윤리로 무장한 그들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그래서 그들, 오늘의 바리사이인들은 사회적으로 강력한 영향력과 설득력을 가지며, '진정한 변화를 막기 위한 변화'라는 그들 본연의 임무를 지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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