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농부가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나그네가 다가와 물었다.
“저 마을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나요?”
농부는 일손을 멈추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떠나온 마을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소?”
“말 마시오. 모두가 저만 알고 솔직하지도 않고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르는 자들이었어요.”
농부가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저 마을에도 그런 사람들일 뿐일 게요.”
조금 있다가 다른 나그네가 다가오며 농부에게 물었다.
“저 마을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나요?”
역시 농부는 일손을 멈추지 않고 그에게 되물었다.
“당신이 떠나온 마을엔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소?”
나그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생각이 깊고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었어요.”
농부가 괭이를 놓고 웃었다.
“저 마을에도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게요.”
물리학에서도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역설이 있다. 고양이가 밀폐된 상자 안에 갇혀 있다. 이 상자에는 방사성 물질이 들어있는 장치와 독가스가 들어 있는 통이 연결되어 있다. 실험을 시작할 때 한 시간 안에 방사성 핵이 붕괴할 확률을 50%가 되도록 해 놓는다. 만약 핵이 붕괴하면 핵에서 방출된 입자가 독가스를 내놓게 해 고양이를 죽인다. 핵이 붕괴하지 않으면 고양이는 살아 있다. 한 시간 후 상자 안의 일을 알지 못하는 관찰자는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양자역학적 해석에 따르면 상자를 열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아있는 상태와 죽은 상태가 겹쳐져 포개진 상태로 존재한다. 관찰자가 상자를 여는 순간에 고양이는 삶과 죽음 중 하나의 상태로 고정된다. 즉, 고양이의 삶과 죽음이 관찰자의 행동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관찰 행위가 대상의 상태를 결정한다.
두 이야기에는 닮은 점이 있다. 그것은 ‘의식이 존재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과 무관한 객관적 실체를 당연시한다. 양자역학은 존재에 대한 그런 관점에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거시세계에도 동일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느냐는 논란이 있지만 우리의 의식은 세계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세계는 수많은 가능성이 포개진 상태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와 접촉하면서 그런 가능성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착한 사람들일 수도 있고, 사기꾼들일 수도 있다. 마을에 들어가는 나그네의 의식 상태에 따라 착한 사람들의 마을이 되기도 하고, 사기꾼의 마을이 되기도 한다. 또는 나그네에 따라 다른 가능성도 수없이 존재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도 했다. 일체의 제법(諸法)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다.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 내고, 내 안에 있다. 그렇다고 외부의 물리세계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의식과 동떨어진 객관적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내 밖의 존재들은 온갖 다양한 가능성과 양태를 내포하고 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예에서 보는 것처럼 삶과 죽음의 상태가 포개져 있기도 하다. 그런 미확정의 세계와 접촉하면서 나는 한 세계를 선택하고 그 세계가 내 앞에 열린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같은 시공간을 살지만 실제는 서로 다른 수많은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다. 한 송이의 꽃을 보더라도 모두가 다른 꽃을 본다. 같은 산에 오르지만 모두가 자신이 만든 산길을 걷는다. 꽃을 보는 사람 수 만큼의 꽃이 있고, 산을 오르는 사람 수 만큼의 산이 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스스로가 아름다운 사람이 되면 된다. 그러면 마음이 곱고 착한 사람들이 주변에 모일 것이다. 해답은 내 마음에 있다. 요즈음은 이런 사실을 새롭고 감사하게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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