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권정생 선생의 유언장

샌. 2009. 5. 16. 10:38

권정생 선생의 2주기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권정생 선생과는일면식도 없었지만 그분의 특별한 삶으로 인해 내 가슴에 늘 살아계신다. 권 선생과는 생전에 한 번 뵈올 수도 있었다. 권 선생과 잘 아는 사이인 M이 언제 같이 한 번 찾아뵙자고 했는데 감히 내가 그분을 어떻게 하다가 기회를 놓쳤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때 염치 불구하고 안동으로 내려갔었더라면 싶다.

자신의 생각대로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위대하다. 우리 같은 범인들이야 생각 따로 행동 따로다. 책장에는 온갖 무소유와 비움과 청빈에 대한 책이 가득하지만 삶은 그와 정반대다. 정신으로는 그런 척 하지만 몸은 물질의 단맛에 빠져 있다. 자신의 소유와 욕구를 버린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그러나 권 선생은 일생을 그렇게 사셨다. 말하고 글 쓰는 것이 삶과 일치하면서 평생을 한결 같을 수 있다는 것은 보통 사람은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아마 나는 원만 품다가 일생을 마칠 것이다. 나에게 권 선생은 다다를 수 없는 높은 봉우리이다. 권 선생은 돌아가시기 2년 전에 주위의 권유로 유언장을 작성했다고 한다.유언장에도 선생의 고결하고 담백한 인품이 서려 있다. 고질적인 병의 고통과 죽음을 앞에 두고도 이렇게 여유 있고 유머러스하다니 역시 권 선생답다는 생각이 든다.

유언장을 다시 읽어보면서, 권 선생님! 지상에서의 고통 모두 잊으시고 하늘나라에서 안식하소서....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게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 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 1일 쓴 사람 권정생



'참살이의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태적 개종  (0) 2009.07.12
마음의 보약  (0) 2009.06.04
여든 청년 톨스토이  (0) 2009.05.12
누가 바리사이인가?  (0) 2009.04.23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0) 2009.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