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랑탕 트레킹(2)

샌. 2009. 2. 2. 19:11

오늘은 랑탕 트레킹의 시작 지점인 샤브루벤시(Schabrubensi)까지 가는 날이다. 카트만두에서 샤브루벤시까지는 140 km 정도 되지만 길이 워낙 험한 탓에 버스로 아홉 시간이나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세수하고 짐을 싼 뒤 호텔 입구에 모였다. 카트만두는 밤새 정전이 계속되어 캄캄한 방에서 헤드랜턴을 켜고 세수를 하고 카고백을 꾸렸다. 호텔에는 이번 트레킹 동안 우리와 동행할 가이드와 포터도 나왔다. 우리 일행이 열두 명인 관계로 전위와 후위를 맡을 가이드 두 명에 짐을 날라줄 포터 열두 명을 더해 총 열네 명이었다.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사는 종족을 셰르파족이라 하는데 이들은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사람들의 짐을 져주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들은 고산 등반에 천부적인 능력을 발휘하면서 원정대의 단골 포터가 되었다. 이들의 수입 또한 다른 네팔인들에 비해 월등히 높다고 한다. 따라서 꼭 셰르파족이 아니더라도 일자리가 부족한 네팔 젊은이들에게 포터는 인기 있는 직종이다. 우리가 고용한 가이드나 포터는 대부분 2, 30 대였고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40 대였다. 보수는 가이드가 일당 12 달러, 포터는 10 달러로 했다. 이 돈도 소개소에 일부를 뜯기면 온전히 받지 못할 것이다. 하루에 만 원 정도를 받고 무거운 짐을 지고 올라가는 중노동이지만 이 정도면 네팔에서는 상당히 큰 금액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번 포터로 다녀오면 가족의 몇 달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을 장만할 수가 있다고 한다.


지붕에는 카고백을 싣고 일행과 포터 등 총 26명을 태운 전세버스는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어두운 카트만두를 출발했다. 한 시라도 빨리 출발해야 한다고 아침 식사도 하지 못했다. 미명의 거리는 벌써 시내로 들어오는 부지런한 사람들로 붐볐다. 카트만두는 새벽 거리조차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다. 20분 정도 지나서 시내를 벗어나 숲으로 들어갔다. 길은 산속을 따라 꼬불꼬불 이어졌다. 가끔씩 허름한 시골 마을들이 나타났고 산의 사면에는 계단식 경작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지가 없는 산악지대에서 농작물을 가꾸기 위해서는 산비탈을 일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깊이 들어갈수록 그런 다랑이논밭은 규모가 커졌는데 멀리서 보면 예술적인 아름다움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에 감탄하다가도 그 속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싸해졌다.


버스는 꼬부랑 산길을 잘도 올라갔다. 길의 폭은 차 한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정도인데 커브에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클랙슨만 울리며 그냥 달렸다. 만약 맞은편에서 차가 온다면 정면으로 부딪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곳 지리에 밝은 베테랑 운전사의 감각을 믿을 수밖에는 없었다. 버스의 클랙슨 소리는 특이하게도 단순한 ‘빵’이 아니라 ‘빵빠라밤’하는 식으로 리드미컬하게 울렸다. 커브-‘빵빠라밤’-커브-‘빵빠라밤’... 이런 식의 리듬이 쉬지 않고 이어졌다. 길은 부실하긴 해도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포장은 트리슐리까지 되어 있는데 이 정도면 고속도로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을 뒤에 가서야 알 수 있었다.




히말라야 하면 첫 느낌이 우선 설산(雪山)이 떠오른다. 히말라야에 가는 이유도 표면적으로는 설산을 보기 위해서이다. 물론 설산은 단순히 눈이 덮인 산이 아니라 만년설로 되어 있어야 한다. 지구 역사에서 지금으로부터 1만 수천 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시작되었는데 네팔 쪽 히말라야에는 6,000 m 급 이상이면 정상부는 만년설에 덮여 있다. 그러므로 만년설이라는 표현은 숫자적으로도 정확한 말이다. 버스가 출발한지 한 시간 쯤 지났을까, 드디어 멀리 하얀 설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탄성을 지르며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와 사진을 찍었다. 이제 내일이면 저 설산 옆으로 간다. 사진으로만 보던 히말라야의 풍경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내 발로 걸어보게 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만큼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것도 없다.


버스가 지나는 길 옆 작은 마을들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집 밖에 나와 일을 하거나 해바라기를 하고 있었다. 집 안보다 밖이 더 따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들의 무심한 표정과 슬픈 눈동자는 그들의 가난한 모습과 함께 지금도 선연하게 남아 있다. 특히 네팔 여인들은 비록 겉은 남루했지만 무척 아름다웠다. 그 중에서도 크고 깊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는데 수천 대에 걸친 슬픔과 고난이 그 속에 녹아있는 것 같았다. 또한 체념을 통한 낙관이라고 할까, 눈은 큰 호수처럼 깊고도 공허하며 신비한 마력이 숨어있어 보였다. 이곳 여자들은 인도인을 많이 닮아 있다. 옆 사람의 설명으로는 인도-아리안족에 속한다고 한다.


경제적 수치로 나누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를 갖게 된다. 네팔과 비슷한 수준의 방글라데시는 행복지수로는 세계에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네팔도 아마 비슷하리라고 생각된다. 아마 50년대의 우리를 서양인들이 보았다면 지금 우리가 네팔인들을 보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궁핍하고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도리어 그때가 더 행복했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추억한다. 발전과 풍요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적 만족감과 영혼의 충일함이다. 나는 저들의 겉모습만 보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나는 저들의 내면세계를 보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우리만큼 모질고 궁핍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전 9시 20분에 비교적 큰 마을인 트리슐리(Trischuli)에 도착했다. 아침 식사는 버스에서 빵으로 때운 뒤라 여기에서 과일을 사고 차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했다. 작은 찻집에서 한 잔에 20 루피 하는 블랙티를 시켰는데 맛은 우리의 홍차와 비슷했다. 이곳 사람들은 아래쪽과 인종이 다른 것 같다. 티베트인 비슷한 동양적 용모가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했다.




트리슐리에서 둔체까지는 이정표에 48 km라고 되어 있지만 4 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그만큼 비포장의 험로다. 버스는 트리슐리를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장이 나서 움직이지 못했다. 사람들은 모두 내리고 운전기사는 망치를 가지고 차 밑에 들어가 수리를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들은 산책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런 데서 버스가 고장 나는 것은 다반사라는 것을 여러 여행기를 통해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러므로 조급해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고치면 가고 못 고치면 안 가면 되는 것을, 여기서는 절로 느긋해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도로 옆 논둑에서 예쁜 꽃을 만났다. 이름은 모르지만 여기서 가장 흔하게 보는 꽃이다. 차가 고장 나니 이렇게 새로운 꽃도 자세히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할 이유가 없다. 행복한 인생길은 되어가는 대로 즐기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인생살이가 내 뜻대로 되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안달할 필요도 조바심칠 이유도 없다.


차는 쉽게 고쳐질 것 같지 않았다. 도로 옆의 강으로 내려가 본다. 이름이 트리슐리강이다. 히말라야의 눈이 녹은 물이 랑탕강으로 흐르다가 또 다른 강물과 합쳐져 트리슐리강으로 된다. 이 강은 인도쪽으로 흘러 갠지스강과 합류한다. 강폭은 매우 넓었고 강변에는 둥근 돌들이 널려있었다. 강물은 뿌연 우윳빛이다. 이곳은 석회암 지대라 물이 맑지 못하고 이렇게 뿌연 색깔이다. 그러므로 외지인은 직접 물을 마시면 배탈이 나므로 반드시 끓여먹어야 한다. 히말라야의 물 하면 굉장히 맑고 순수할 것 같지만 도리어 반대다. 히말라야 청정지역에 들어와서도 생수를 사서 마셔야 하는 아이러니가 재미있다.




강가에서 야생 원숭이들이 뛰어노는 풍경은 이색적이었다. 또 강변에서는 사람들이 군데군데 모여 돌을 깨고 있었다. 전에 TV에서 보았던 풍경인데 노인이나 어린이, 부녀자들이 이렇게 돌을 깬 수입으로 연명하고 있다. 큰 돌은 망치로 깨어 자갈로 만들어 모아 놓으면 트럭이 와서 실어간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해도 하루 종일 일하다 보면 아차 하는 사이에 부상을 입는 위험한 작업이다. 그래서 돌 파편에 눈을 다치거나 손가락을 잃은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겉으로 보이는 강은 아름답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연은 안타깝고 슬프다.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 집 앞 강에서 자갈을 모아서 팔았던 기억이 있다. 어느 해 여름은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일에 매달렸다. 삽으로 땅을 파서 채에 거르면 적당한 크기의 자갈이 남는다. 그런 식으로 모은 자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으면 트럭이 와서 돈을 계산하고 실어갔다. 그러나 여기처럼 돌을 깨지는 않았으니 당시는 힘이 들어서 그랬지 다칠 위험은 없었다. 트리슐리강에 앉아 돌 깨는 네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어린 시절을 그립게 추억했다.


버스는 한 시간 만에 수리를 마치고 다시 출발했다. 여기서부터 샤브루벤시까지는 스릴 만점의 비포장 험로다. 버스는 천길 낭떠러지를 따라 심하게 요동을 치며 기어간다. 한 번 잘못 기우뚱하면 그대로 자유낙하 실험이 될 것 같다. 절벽 아래는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도대체 바닥에 닿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이럴 때는 물리공식을 가지고 계산이나 하면서 딴청을 부리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도 운전기사나 포터들은 노래를 부르고 농담을 하며 태연작약이다. 그런 생사를 초월한 듯한 모습들이 얄밉기만 하다. 그래도 우리 일행 중 몇몇은 마음 편하게 코를 골며 자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창문을 닫아도 바깥 공기와 차단이 안 되는 버스 실내는 먼지로 가득하고 얼굴과 손등은 버석거린다. 그러나 여기는 먼지에 신경이 쓰일 정도로 여유 있는 길이 아니다.




네팔의 로컬 버스는 늘 사람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나머지 사람들은 버스 지붕으로 올라간다. 사람들은 버스가 흔들려도 지붕 위에서 잘도 버티며 견딘다. 그러나 보는 우리들만 불안하지 저들에게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 가끔씩 떨어져 죽거나 큰 부상을 당한다는데 승객이나 버스 측에서나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앞서가는 로컬 버스에서 재미있는 광경을 보았다. 지붕 위에 두 젊은이가 탔는데 연신 서부활극 흉내를 하며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일어서서 결투를 벌이는 연출을 하는데 넘어지는 모습이 꼭 버스에서 떨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데 거의 서커스 수준이었다. 그래도 버스는 잘도 가고 아이들은 한없이 까불어댔다. 과연 저들에게 무서운 건 무엇이란 말인가.


얼마나 버스에서 가슴 졸이며 흔들리고 시달렸던지 아픈 허리 통증도 사라졌다. 나는 무지막지한 히말라야 마사지를 받아서 나았다고 속으로 웃었다. 드디어 고난의 길을 헤치고 둔체(Dunche)의 체크 포인트에 도착했다. 여기서 모든 관광객들은 입산 신고를 하고 허가를 받아야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입산료는 일인당 1000 루피였다.




둔체를 지나니 멀리 밑으로 오늘의 목적지인 샤브루벤시 마을이 보였다.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다랑이 밭과 그 사이로 난 사람 발 모양의 지그재그 내리막길이 보였다. 저 길은 하늘에서 보면 꼭 사람의 발가락 모양으로 생겼다. 버스는 올라가는 것만큼 내려가는 것도 힘들어했다. 그러나 긴장도 오래 계속되면 만성이 되는 법, 이젠 어지간한 아슬아슬함은 즐길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그래, 나도 너희들 마냥 ‘케세라세라‘다. 드디어 오후 3시를 약간 넘어서 우리 일행은 무사히 샤브루벤시에 도착했다. 오! 하느님, 부처님 감사합니다.




바로 붓다 호텔(Buddha Hotel) 롯지에 짐을 풀었다. 다른 롯지에 비해 시설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포터가 옮겨온 카고백에서 침낭을 꺼내 침대 위에 폈다. 롯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침낭을 꺼내서 펴놓는 일이다. 야채볶음밥으로 이른 저녁을 먹고 마을 주변을 산책했다. 거기서는 가난하지만 당당하고 인간적 품위를 잃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 약간의 두통이 있었다. 동쪽 높은 산 위로 휘영청 보름달이 떠올랐다. 아쉽게도 당분간은 히말라야의 별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소형 수력 발전소가 있어 전기도 들어오고 온수도 나왔다. 수도인 카트만두보다도 전력 사정이 좋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수를 하고 머리도 감았다. 앞으로 10여 일 동안은 세수조차도 못 할 것이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끓여 수통에 담아 침낭 안에 넣었다. 물의 열기가 차가운 히말라야의 밤을 조금은 따뜻하게 해 줄 것이다. 무슨 일인지 붓다호텔 뒷산에 산불이 일어 화염이 위에서부터 붉게 긴 줄을 그으며 타고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여기서는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을 것이다. 불은 그렇게 다음 날 아침까지 혼자서 계속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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