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네팔로의 직항로가 열려 히말라야 가는 길이 편리해졌다. 전에는 홍콩이나 태국에서 환승을 해야 했는데 이젠 7 시간 정도면 바로 네팔 카트만두 공항과 연결된다. 우리 일행 12 명이 탄 대한항공 KE695 편은 1월 8일 오전 9시 30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네팔 시간으로 오후 2시에 카트만두공항에 도착했다. 네팔은 우리나라와 3시간 15분의 시차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네팔은 인도와 거의 같은 경도상에 있지만 인도와도 15분의 시차를 일부러 두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일본의 표준시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과 비교되는 일이다.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도 히말라야에 간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가고는 싶었지만 너무나 먼 곳, 죽기 전에 꼭 한 번 다녀오리라 다짐은 했지만 그 꿈이 지금 이렇게 이루어지리라고는 몇 달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옆의 동료가 히말라야의 랑탕 트레킹 계획을 말했을 때 바로 오케이를 한 것은 마음속에는 이미 그곳에 가야 한다는 결심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일은 아주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다만 걷는 것에 대한 자신감 하나만으로 히말라야 트레킹을 너무 쉽게 생각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리저리 재다보면 망설이게 되고 그래서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중학교 동기인 S를 만났다. 그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러 H 여행사의 패키지에 참가하고 있었다. 얘기를 나눠보니 S는 프로라 할 정도로 해외의 산을 많이 다녔다. 이번에는 일행이 없어 혼자 참가했다는데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우리보다 일정이 사흘 정도 짧았다. 아마 나도 이 팀이 아니었다면 친구처럼 혼자서라도 여행사 프로그램에 동참했을 것이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씩밖에 얼굴을 보지 못하는 친구를 히말라야 행 비행기 안에서 만날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우리는 서로의 길을 격려해 주고 내년에는 함께 트레킹을 하자는 희망도 나누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의 액땜이었는지 출발하기 전 날 짐을 싸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카고백의 짐이 20 kg이 넘어서는 안 된다고 해서 수차례 짐을 조절하며 저울에 달다가 허리에 과부하가 걸린 때문이었다. 허리 근육이 뭉쳐서 몸을 굽히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동안 몸을 무척 조심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엉뚱한 데서 일이 터진 것이다. 다행히 심하지는 않아서 걷는 데는 그다지 지장이 없었다. 허리는 사흘 가량 신경 쓰게 만들더니 본격적으로 히말라야 산속에 들어서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카트만두 공항에 내리니 따스한 온기가 제일 먼저 반겨준다. 네팔은 아열대 기후라 한겨울에도 낮에는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밤이 되면 싸늘해진다. 공항 터미널은 우리나라 시외버스 정류장 정도의 규모였고 한산했다. 그러나 입국하며 비자를 발급받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비행기가 한 대만 도착했는데도 담당자가 두 사람밖에 없어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서울 같았으면 짜증이 났을 텐데 웬일인지 여기서는 느긋하기만 했다. 네팔에서는 ‘빨리 빨리’가 통하지 않는다. 트레킹을 하며 가이드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비스따리 비스따리’였다. 우리말로는 ‘천천히 천천히’라는 뜻이다. ‘비스따리’의 나라에서 ‘빨리 빨리’를 신봉하다가는 화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는 ‘빨리 빨리’의 나라에서 ‘천천히 천천히’의 나라로 옮겨진 것이다.
공항을 나서니 ‘네팔짱’에서 마중을 나와 있었는데 꽃다발을 목에 걸어주며 환영을 해 주었다. 향기가 무척 진한 노란색의 고운 꽃이었다. 네팔짱(Nepal Zzang)은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현지 여행사다. 여사장님은 20대 시절에 네팔에 와보고는 네팔이 좋아서 아예 사업을 차렸다고 한다. 여기서 가이드랑 포터를 구해주고 환전, 교통편 등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받았다. 짐을 옮길 때는 어디선가 네팔 아이들이 달려들어 거들어주고는 “Korean Money!"하며 돈을 달라고 한다. 신발도 신지 못하고 꾀죄죄한 아이들의 용모가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앞으로 수도 없이 만나야 할 네팔의 풍경 중 하나인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카트만두 시내의 풍경은 충격이라 할 정도로 놀라움 그 자체였다. 누군가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도시 중 하나로 카트만두를 꼽았다는데 도시의 혼란만큼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혼돈스럽게 만드는 곳이었다. 사람과 차, 자전거와 오토바이로 뒤범벅된 도로는 온통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했다. 모든 차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경적을 울려대고 거리는 더 이상 혼잡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또한 거리에는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사람들 표정은 더없이 낙천적이고 편안해 보였다. 물론 많이 지쳐있는 모습이기는 했다. 삶을 포기한 것 같기도 하고 달관한 것 같기도 한 카트만두 사람들의 얼굴은 나로서는 난해하고 불가사의하기만 했다. 하여튼 카트만두의 풍경은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고, 머릿속은 자꾸만 엉키는 실타래처럼 복잡해지기만 했다.
카트만두의 명동이라는 타멜(Tamel) 거리에 있는 임파라 호텔(Impala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그러나 말이 호텔이지 우리나라의 여관 정도의 숙소다. 더욱이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난방도 되지 않는다. 방안이 도리어 밖보다 더 써늘했다. 어쩔 수 없이 침낭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국민소득이 250 달러에 불과한 네팔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다. 요사이는 경제 사정이 더욱 어려워져 수도인 카트만두에도 하루에 전기가 들어오는 시간이 8 시간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밤이면 큰 가게들은 자가 발전기를 돌리는데 거기서 나오는 소음과 매연으로 온 도시가 목이 따가울 정도로 매큼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네팔짱의 정원에서 만난 이 붉은 꽃이 더욱 눈물겨웠는지 모른다. 마치 종이 같은 꽃잎을 가진 이 꽃은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본 것이다. 사람살이는 천양지차가 나도 꽃만은 한국이나 네팔이나 똑 같다. 미화 800 달러를 62,000 루피로 환전했다. 그중에서 공금으로 쓸 돈은 55,000 루피다. 네팔 돈 100 루피는 우리 돈으로2,000 원이 조금 더 된다.참고로 우리가 묵은 임파라 호텔의 숙박비가 400 루피였다.
저녁 식사는 카트만두의 최고급식당이라는 ‘K-TOO'에서 야크스테이크로 했다. 내일부터 깊은 산속에 들어 원시생활을 하기 전에 마지막 호사를 부려본 것이다. 식탁의 촛불은 분위기를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살기 좋은 나라에서 전깃불에 익숙했던 눈이 갑자기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놀랐으리라. 나온 고기가 어느 정도 익은 것인지 눈이 아니라 입맛으로 판별해야 했다. 식당 손님은 네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우리 일행을 제외하면 모두가 서양인들이었다. 스테이크 일인분이 500 루피, 맥주 한 병이 300 루피니 네팔 사람이 이용하기에는 너무 비싼 음식점인지 모른다.
카트만두 타멜의 밤거리는 낮보다 더 시끄럽고 복잡했다. 정신 차려야지를 주문처럼 외며 걸어가는데 내가 있는 이곳이 스타워즈에 나오는 다른 행성처럼 느껴졌다. 또는 혼란한 1800년대 말의 영화 세트장이 연상되기도 했다. 어쨌든 독특하고 특별한 분위기의 카트만두의 밤이었다. 허름한 가게들 사이에는 서울의 슈퍼와 닮은 큰 현대식 마트도 있었는데 입구에는 몽둥이를 든 건장한 사내가 지키고 있었다. 거지 아이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 가게들 앞에는 외국인들에게서 과자라도 얻어먹으려는 불쌍한 아이들이 어슬렁거렸다. 우리도 빵을 사서 나오며 가게 앞의 아이에게 하나를 주었더니 걸신이 들린 듯 허겁지겁 먹는데 바로 쳐다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꼭 내가 무슨 죄라도 짓고 있는 기분이었다.
같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나라마다 이렇게 다르다. 그것은 같은 나라에서도 계층에 따라 또한 그렇다. 한 쪽에서는 넘쳐나는 부를 주체하지 못해 흥청만청이고, 다른 쪽에서는 입에 풀칠도 하지 못하는 극한상황에 시달리고 있다. 네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나는 부유한 나라의 배부른 귀족이다. 그런데도 계속 허기가 진다고 안달하며 탐욕스럽게 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지금 내가 누리는 이 물질적 풍요는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탈취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런 사실을 애써 회피하려는 것일 뿐이다. 물론 네팔이 빈곤한 이유 중에는 네팔 자체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로 포장된 경제 제국주의, 성장과 개발의 신화가 근저에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용산 참사의 소식을 보았다. 세계 경제가 휘청거린다고 한다. 탐욕의 미국식 자본주의에 경고음이 울린 것이다.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호들갑이지만 내가 볼 때는 차라리 잘된 일이다. 약육강식의 이런 경제 체제는 더 시련을 겪어야 하고 어쩌면 붕괴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정말로 인간적인 경제 구조가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카트만두의 밤거리를 지나면서 나는 세상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 많이 화가 났다. 가난한 네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과 최고급 식당에서 야들야들한 고기를 먹으며 누리는 호사와는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잠시나마 세상일을 잊으려 히말라야를 찾았는데 도리어 호랑이 굴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생각은 이제 접어두자. 남루한 옷과 가난에 찌든 몰골이었지만 한 조각의 빵에 감사해하던 맑고 선한 눈동자의 그 아이가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호텔로 돌아와 침낭 속에 들어갔다. 그리고 내 체온으로나마 이 차가운 밤을 견딜 것이다. 네팔에서의 첫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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