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죽어서도 그루터기가 되어 피곤한 나그네에게 의자가 되어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죽어서 쓰러진 나무등걸에서 수많은 숲 속의 생명체들이 살아간다. 전체 숲 생물종의 약 30 %가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살아간다는 조사도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되돌려주는 나무의 모습은 차라리 전신공양에 가깝다.
나무가 원래 이타적인 존재인 것은 아니다. 나무도 오직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살아간다. 그러나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전체 생태계에 도움이 되며 그와 조화를 이룬다. 그것이 인간과 다른 점이다. 무엇을 도와주려고 하거나 기여하려고 하지 않지만나무의삶은 모든 존재에게 필수불가결이다. 그것이 나무가 아름다운 이유다. 그래서 나무는 죽어서도 아름답다.
문경새재 주흘관 옆에 전나무 그루터기가 보존되어 있다. 30 년 전만 해도이곳에는 수령 600 년의 전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진으로만 전해지지만 높은 키는 성곽을 넘어 어디서도 다 보였다. 조선시대 과거를 보러 오가던 사람들로부터 새재길을 지났던 모든 길손들의 벗이 되었을 나무였다. 그런데 1978 년에 제 수명을 다해 쓰러졌고, 지금은그루터기 일부만 남아 있다.
살아있을 때의 전나무 사진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인테넷에서 찾아보니 1950 년대에 찍었다는 희미한 흑백사진밖에 없다. 그래도 당시의 나무 위용이 느껴져 다행이기는 하다.
어디선가 나무의 일생과 사람의 일생을 비교한글을 보았다.
첫째, 나무는 죽어가면서 온갖 생물에게 양식이 될 뿐아니라 살아 있을 때 저장했던 양분을 모두 숲으로 되돌린다. 그런데 사람은 평생 모은 재산을 오로지 자기 자식에게만 물려주려 한다. 오래된 숲의 나무는 '사회 상속'을 하지만, 사람은 '개인 상속'에 그친다. 만약 우리가 나무를 본받아 모두 사회 상속을 한다면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는 한결 희망적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맞벌이 부모가 아이를 돌볼 수 없어 방문을 걸고 나갔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애들이 죽는 일도 없을 것이고, 한겨울에 노숙자가 전화박스 옆에서 얼어 죽는 일도 없을 것이다.
둘째, 나무는 살아서 성장하는 과정이나 죽어가는 과정이 더디고 길다. 그런데 사람은 사는 동안 무엇이든 서둘려 이루려 하고, 죽고 나면 하루빨리 효율적으로 '처리'되고 만다. 나무는 삶과 죽음이 모두 생명 활동으로 통일되어 있지만, 사람은 삶과 죽음이 나눠져 있다. 그래서 나무에게는 죽음조차 행복한 생명 활동이지만, 사람에게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다. 만약 우리가 나무를 본받아 죽음조차 행복한 생명 활동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 자신의 삶 또한 조급함이나 집착이 없이 더불어 건강한 것으로 채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
셋째, 나무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온갖 동식물들에게 밥도 되고 집도 되고 옷도 되어 준다. 나무와 더불어 사는 모든 동식물은 어느 것 하나 쓸데없는 것이 없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도 제각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숲은 자연스럽고 다양하고 풍요롭다. 그런데 사람은 '돈벌이'를 위해 '인재'만 키우려 드는 바람에 다양한 가능성이 획일적으로 변하게 된다. 점수나 성과로 드러나지 않는, 삶의 다른 풍성한 면들은 억압 받기 쉽다.
사람들이 나무를 닮아 더불어 커다란 숲을 이루고, 나아가 서로서로 쉼없이 선물을 주는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 순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