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를 지나 계곡을 따라 도솔산으로 가는 길이 나는 좋다. 다른 일로 고창에 갈 때도 가능하면 따로 시간을 내어이 숲길을 자주 찾는다. 시간 여유에 따라 짧게는 한 시간 정도, 길게는 두세 시간 정도 산책을 한다. 관광객들은 대개 선운사 경내만 둘러보고 내려가는데, 절을 지나서 산으로 이어진 이 길의 매력을 대부분 모르고 있다.
도솔산은 선운산이라고도 부르는 산인데, 선운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 산자락을 따라 암자와 수도굴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577년 선운사가 창건될 당시에는 89 암자에 3,000승려가 수도하였던 대가람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도솔암, 진흥굴 등 열 개 안팎의 암자만 남아있다. 내가 좋아하는 길은 선운사에 계곡을 따라 도솔암으로 이어지는 산길이다.
10여년 전 이 길에 처음 들어섰을 때 굉장히 포근하고 따뜻한, 그리고 눈에 익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고향길에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전생에 내가 이곳에 있었던 수도승이 아니었나 하는 상상도 해본다. 길은 계곡 물소리, 솔바람 소리와 함께 위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특유의 숲냄새도 후각을 자극한다. 내 주관적 경험일지 모르지만 이 길은 다른 어느 곳보다 시청후각 효과가 높다. 그래서 이 길에 들면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거의 경사가 없는 부드러운 흙길이 휴게소까지 연결되는데 이곳까지 천천히 산책하고 오는데 약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휴게소에서 진흥굴까지의 구간은 분위기가 또 다르다. 여기는오르막 내리막이 귀엽게 반복되는 오솔길이다. 작은 계곡과 벗삼아 오르는 길이니 이 길에서는 아무데서나걸음을 멈추어도 좋다. 올라오는 동안 속세의 찌든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마음은 평화로 가득해진다. 인간의 말보다는 자연의 설법에 나도 모르게 감화된 탓일 것이다.
우주의 기가 모여있는 영적인 장소가 있다고 한다. 영감이 뛰어난 사람들은 그런 기를 감지한다고 한다. 그런 곳에서는 명상도 잘 되고, 우주적 에너지와 합치되는 종교적 충일감의 상태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그런 곳을 찾아가기도 한다. 나에게는 이곳이 바로 그런 장소이다.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고, 단지 감정상의 느낌일지 모르지만 이 숲길에서 내가 받는 뭔가는 다른 곳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에게는 이 길이 명상의 길이고 평화의 길이다.
단지 이 길은휴일에 사람이 많을 때 가서는 안 된다. 홀로 걷지 않으면 이 길의 참맛을 느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람들의 소음으로부터도 멀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 길 역시 예전의 소박한 맛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많아지니 길은 자꾸 넓어지고, 길 옆으로는 녹차밭을 만들어 자연의 아름다움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새로 조성한 꽃무릇 단지도 마찬가지다. 가을이면 장관을 이루지만 내 눈에 그런 인공적인 아름다움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한다. 자연은 그냥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이번에 찾아갔을 때 선운사 입구의 넓은 공터에는 새로 생태숲 조성 공사를 하고 있었다.이런 사업을 벌이는 목적은 분명하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유치해서 구경거리를 제공하고 수입을 올리려는 것이다. 그러자니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뭔가를 자꾸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진부해지면 허물고 다시 새로운 아이템을 찾는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인공으로 꾸민 자연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사랑하는 도솔산 가는 길도 언제까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지 자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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