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회색 손님

샌. 2007. 5. 14. 14:05

불청객 회색 손님이 다시 찾아왔다. 이 손님은 내 집을 점령하곤 온통 나를 무기력증에 빠뜨린다. 때도 없이 나타나서는 몇 주씩 머무르며 회색빛 세상만 보여주는데 이때 나는 세상 살 맛을 잃는다. 어제까지 찬란하던 신록이 오늘은 잿빛 어둠 속에 잠겨있다. 어떨 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기만 하다. 세상은 나를 등지고 돌아앉았고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외톨이로 고립되어 누구 하나 신경써 주는 사람 없어 외롭기만 하다. 못난 나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그러나 가만히 돌아보면 회색 손님이 아무 때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안 좋은 일들이 겹쳐지며 증폭되어 내 자신이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다. 이때 회색 손님은 슬그머니 안방을 차지하고 앉아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한다. 그러면서 며칠을 보내면 이제 나는 그 사람을 쫓아보낼 기력도 없어진다. 상황이 호전되기를기다리는 길밖에는 없다. 손님은 호락호락 쉽사리 물러나지를 않는다.내 힘이 아닌 외적인 상황 변화가 생겨야 나는 다시 에너지를 얻고 손님과 마주할 여유를 찾는다.

회색 손님은 오늘같이 잔뜩 찌푸린 날씨일 때는 더욱 기세등등해 진다. 나는 그냥 축 가라앉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물을 잔뜩 머금은 솜덩이 마냥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가슴으로 큰 포탄이 지나간 양 뻥 뚫린 사이로 찬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내 상태를 눈치 채지는 못한다. 약간은 저기압이구나 하고 느끼겠지만 내 속마음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고통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래 지속될 때는 내성이 생기는지 회색 손님과 따스하게 눈맞춤하며 동석을 즐기기도 한다. 그것은 내 본성의 우울한 기질과 맞아떨어지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기호 탓인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이런 기간이 꽤 오래 계속되는 편이다. 그러므로 나는 회색 손님을 꼭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본성 중의 일부가 드러난 현상으로 생각한다면 비록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오는 손님 막지 않고, 가는 손님 붙잡지 않는다'는 우리 마음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무수히 명멸하듯 나타나고 사라지는 사념들도, 그리고 가끔씩 찾아와 장시간 죽치고 앉아있는 회색 손님도 오면 오는대로, 가면 가는대로 그냥 지켜볼일이다. 무엇을 막고 무엇을 맞으며 호불호(好不好)를 가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바닥 상태로 추락했다면 그 바닥 상태를 즐기기 - 그것이 바닥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대응임을 이만큼 살고나서야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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