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글과 삶이 일치하셨던 분

샌. 2007. 5. 19. 09:07

평소 흠모해 왔던 권정생 선생님이 별세하셨다. '강아지똥' '몽실언니' 등을 쓴 동화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분의 삶이 더 진한 감동을 준다. 신문에도 '글과 삶이 일치했던 사람'이라는 소개가 실렸다. 그분의 책 중에서 특히 '우리들의 하느님'을 좋아하는데 자연과 생명, 가난한 이웃을 사랑했던 선생님의 얘기가 진솔하게 실려있다.

자신이 하는 말대로, 자신이 쓰는 글대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 말과 글이 화려할수록 대개의 경우 그 사람의 실상을 보고는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진실되게 살려는 사람들의 근원적인 고민은 그런 데서 시작된다. 그나마 덜 위선적이 되려면아예 입을 닫는 수밖에 없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강단의 설교자들이야말로 가장 죄를 많이 짓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내 경우도 아내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비난이 말과 실천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머리와 입은 발달했는데 하는 행동을 보면 몸 따로 마음 따로 노니 가까운 가족한테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사랑과 가난을 읊으면 뭣 하는가, 인간이 덜 되어도 한참이나 덜 된 경우다. 최소한 가족한테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밖에서 무슨 말을 하든 큰소리를 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절감한다.

선생님은 그 인품과 삶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나도 선생님을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친구를 통해 그분의 누옥을 방문하고픈 소망이 있었다. 그러나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선생님은 갑자기 세상을 뜨셨다. 안타깝지만 멀리서나마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글과 삶이 일치했던 사람' - 이 말이 나 또한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이다. 그렇게 인생을 진솔하게 살고 싶은 바람이 나에게는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내 행적으로 보아 그것은 단지 소망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 그래도 그런 간절한 바람을 늘 잃지 않았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자. 먼 뒷날 후생에서는 언젠가 그 꿈을 이룰 날이 찾아올 줄 누가 알겠는가.

선생님, 힘들었던 여정 접으시고 하늘나라에서 안식하소서!

-------------------------------

< 선생님 영전에 드리는 글 >

 

한겨레신문 / 김용락

 

언제까지나 저희 곁에 계실 것 같았던 권정생 선생님께서 기어이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선생님 동시집 제목처럼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 가셨습니다.

“배고프셨던 어머니/ 추우셨던 어머니/ 고되게 일만 하신 어머니/ 진눈깨비 내리던 들판 산고갯길/ 바람도 드세게 휘몰아치던 한평생을 사셨던 어머니, 평생을 그리워하던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서 어머니랑 함께 외갓집 가고/ 남사당놀이에 함께 구경도 가고/ 어머니와 함께 그 나라에서 오래오래 살았으면/ 오래 오래 살았으면…” (권정생 시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중에서)

선생님의 바람대로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서 오랫동안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아마 선생님이 그렇게 못 잊어 한 목생이 형도 함께 하면 더욱 좋겠지요. 전신 폐결핵이 걸려 동생 혼사에 걸림돌이 될까봐 혼사 끝날 때까지 잠시 좀 나가있으라는 말을 듣고 집을 나와 떠 돈지 칠십 평생, 드디어 어머니 곁으로 가시게 됐습니다.

선생님이 의지하셨던 봉화 전우익 선생님도 그곳에 계시고, 선생님의 든든한 후원자이셨던 이오덕 선생님도 그곳에 계시고, 의성 효선리 김영원 장로님도 그곳에 계시니까 별로 외롭지는 않으시겠네요.

지난 4월 2일, 소변에 피가 쏟아져 나오고, 숨이 가쁘고 통증이 온다고 119 구급차 타고 대구 가톨릭병원에 입원해 열하루를 보내고 퇴원하셨지요. 제가 병실에 들어가니 선생님은 병상에 누워 멀리 내다보이던 두류산공원의 활짝 핀 벚꽃을 보고는 “용락아, 저건 아무것도 아니다. 도시 사람 정말 불쌍타 그지? 저런걸 보고 조타카이. 우리 집에는 지금 명자꽃이 얼마나 붉게 피고 앵두꽃이 필 텐데...” 하시면서 빨리 퇴원하시고 싶어 했지요. 간병사가 선생님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보고 “(기독교) 믿음 생활 하는가 보죠?”라고 묻자 곧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과 목사님이 말하는 하나님이 이따금이 아니라 자주 어긋나 낭패”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줄 만큼 준다고 했는데 요즘 교회는 너무 많이 갖고 있는 게 탈”이라고 말씀해 간병사 아주머니를 무안하게 만들고는 미안해 하셨지요. 사실 선생님은 자주 미국의 횡포와 미국문화의 근간이 된 기독교, 부시 미대통령의 폭력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셨지요. 아울러 북녘 동포들의 어려움에 대해, 특히 중국 국경 주변을 떠도는 북녘 어린이들에 대해서도 많이 안타까워 하셨지요.

17일 오전, 선생님이 또 다시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부랴부랴 병원에 도착해보니 산소 호흡기를 달았지만 의식이 있었고, 매우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계셨지요. 저는 선생님께서 곧 일어나실 줄만 알았습니다. 이렇게 허망하게 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 선생님은 산소호흡기의 고무 호수가 꽂힌 입을 움직여 무언가 맹렬히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입모양을 보고 그게 ‘어메(엄마)’ 라는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어매’ 소리를 2~3분간 안간힘을 쓰면서 지르시더니 더 이상 입모양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나 남은 우리는 선생님이 남기신 뜻이 무엇인지 새기면서 열심히 잘 살겠습니다. 선생님 부디 ‘어머니 계시는 그 나라에’서 전쟁과 폭력, 가난과 소외, 질병의 고통 없는 그 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오.

'길위의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스터의 교훈  (0) 2007.05.31
지지고 볶는 일상이 훌륭한 법당  (0) 2007.05.24
회색 손님  (0) 2007.05.14
알 수 없어요  (0) 2007.05.09
창문을 열고 사는 기쁨  (0) 2007.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