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지지고 볶는 일상이 훌륭한 법당

샌. 2007. 5. 24. 08:39

며칠 전 급체에 걸려 지금껏 고생을 하고 있다. 전날 밖에서 저녁 식사를 너무 험하게 먹었기 때문이었다. 잠은 그런대로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찾아온 통증으로 무척 고통스러웠다. 병원 치료를 받고 겨우 진정되었지만 이틀째 죽으로 연명하며 지내고 있다. '나'에 대한 집착과 과욕이 늘 말썽을 일으킨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우리는 평상시에 잘 인식하지 못한다. 건강이 소중하다는 것은 건강을 잃고 나서야 절감하게 된다. 소화 기능이 마비되니 정상적인 생활이 모두 무너져 버렸다. 작은 통증 앞에서는 이성이니 지성도 아무 소용이 없고 힘이 되지 못했다. 작은 삐끗함 하나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그렇게 내 존재 기반이 허약하고 불안하다는 것을 이번에 새삼 느꼈다.

그래서 잃어야 얻는다는 말은 진실이다. 상실의 아픔은 우리를 새로운 깨우침의 길로 나아가게 한다. 그것이 이 세상에 고통과 슬픔이 존재하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건강이 중요하고, 옆에 있는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배우게 되는 때는 그들이 우리 곁을 떠났을 때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것이 일상이 되어 버리면 지루해지고 고마움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종교가 무엇인지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우쳐주는 가르침이라고생각한다. 크고 위대한 것이 아니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들에 반짝이는 보물이 숨어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현상 너머의 본질을보았던 성현들의 가르침이 아닐까 하고 나름대로 추측해 본다.

마침 오늘 신문에 고우(古愚) 스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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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 구비 산골이었다. 경북 봉화군 봉성면 금봉2리. 17일 오후 산 비틀을 꽉 채운 사과밭 사이를 돌고돌자 문수산 중턱의 금봉암(金鳳庵)이 나타났다. 그곳에 고우(古愚.70.사진) 스님이 있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 코앞이었지만 금봉암에는 연등 하나 걸려 있지 않았다. 고우 스님은 "형식을 통해 본질을 향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바로 본질로 들라'고 말하는 쪽이다"고 했다. 그래서 금봉암에는 제사도, 기도 불공도, 연등 접수도 받지 않는다.

거창한 법회도 없다. 대신 스님은 가까이서, 멀리서 찾아오는 이들에게 구별 없이 차를 건넨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눈다. "법문이 따로 있나. 이게 법문이지." 스님은 상좌의 시봉도 받지 않는다. 그렇게 형식과 권위를 거부한다. 고우 스님은 한국 불교가 손가락에 꼽는 대표적 '선(禪)지식'이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곧 부처입니다. 중국의 마조 스님은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했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말이죠. '마음'도, '부처'도, '무아'도 이름일 뿐이죠. 그 너머에 '부처'가 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오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진짜 부처님이 오신 날은 육신이 태어난 날이 아닙니다. 깨달은 날이죠. 깨닫기 전에는 결코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석가모니께서도 깨닫기 전에는 고뇌하는 인간이었을 뿐이죠. 그러나 깨달은 후에는 달라집니다. 자유자재한 존재, 그 자체로 있는 거죠."

-우리가 보는 세상과 부처가 보는 세상, 둘은 어떻게 다릅니까.

"형상만 본다면 부처가 아닙니다. 또 본질만 봐도 부처가 아니죠. 형상과 본질을 함께 봐야 비로소 '부처'입니다."

-그럼, 형상이란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고우 스님은 '달마 대사' 얘기를 꺼냈다. "당시 중국의 수도는 낙양이었죠." 낙양의 '영녕사(永寧寺)'란 절에 거대한 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목탑이 벼락을 맞았다. 얼마나 목탑이 컸던지 타는 데만 꼬박 1년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럴 정도로 당시 중국에는 절을 크게 짓고, 탑을 높이 쌓는 '형식 불교'가 성행했다고 한다.

숱하게 절을 짓고, 탑을 쌓았던 양 무제가 달마 대사를 만나서 물었다. "내 공덕이 얼마나 되오?" 달마대사는 "무공덕(無功德)"이라고 잘라 말했다. 고우 스님은 "기록에는 '무공덕'이라고 돼 있지만, 요즘 말로 하면 '공덕은 지랄 공덕!'이라고 쏘아붙인 것"이라며 "달마 대사는 그보다 훨씬 자극적인 얘기도 던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왜 그런 자극적인 얘길 했을까요.

"권위와 기득권을 철저하게 부정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선종(禪宗)이죠. '형식'으로 대변되는 권위와 기득권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부처'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불교에선 '불(佛).법(法).승(僧)', 이 삼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어디에 '선(禪)'이 있습니까.

"선은 절에도 없고, 법에도 없고, 스님들 속에도 없습니다."

-그럼 어디에 있습니까.

"선은 모든 사람들의 생활 속에 보편돼 있습니다.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 녹아 있죠.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선'입니다."

-그런데 '선'을 보는 것이 왜 그리 힘듭니까.

"선이 형식화했기 때문이죠. 부처님이 오신 지 2500년이 흘렀습니다. '부처'를 찾기 위해 방편으로 마련한 '과정'과 '수단'이 형식화한 거죠. 더구나 사람들은 그 형식을 붙들고 있습니다. 달은 안 보고, 손가락에만 집착하는 거죠. 선은 철저하게 그 형식을 깨고, 본 모습으로 돌아가는 작업입니다. 그게 바로 선 수행이죠."

며칠 전, 인도의 한 요가 수행자가 고우 스님을 찾아 왔다. "한국의 선불교를 알고 싶다"며 금봉암으로 온 것이다. 그때 고우 스님이 물었다. "인도에는 요가 수행의 고수들이 많지요?" "네, 몇 달씩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꼼짝도 안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대단한 분들이죠."

고우 스님이 말했다. "눈을 감았을 때만 찾아오는 평화는 진짜가 아닙니다. 눈 뜨고 생활하는 이 자리에서 고요하고, 이 자리에서 평화로워야 합니다. 눈을 감았을 때만 고요하다면 그게 바로 '공(空)에 떨어진 자리'죠." 일상 속에서 통하고, 생활 속에서 통해야 진짜 '선'이라는 얘기였다.

-세상은 각박합니다. 일반인이 지지고 볶는 일상에서 '고요'와 '평화'를 찾는 것이 가능합니까.

"물론입니다. 지지고 볶는 일상보다 더 훌륭한 법당은 없습니다. 형상을 붙들고 있는 '나'를 매순간 볼 수 있으니까요. 그 '나'를 비우면 본질을 볼 수 있죠."

-본질을 보는 순간, 어찌 됩니까.

"본질을 보면 알게 되죠. '모든 것이 평등하구나.' 부자도, 가난한 이도, 신분이 높은 이도, 낮은 이도, 지혜가 많은 이도, 적은 이도, 모두가 평등함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 불교의 위대한 가르침이 있는 거죠."

-모두가 평등함을 알면 어찌 됩니까.

"남과 비교를 안 하게 되죠. 인종도, 민족도, 종교도 비교를 안 하게 되죠. 있는 그대로 평등하니까요. 그래서 갈등과 대립이 절로 풀립니다. '봄날에 눈 녹듯이' 모두가 풀리죠. 듣기 좋다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을 '21세기 인류의 대안'이라고 하는 겁니다."

고우 스님은 '똥 푸는 사람' 얘길 꺼냈다. 부처님 당시에 똥을 푸는 사람은 인도의 천민 계급이었다. 부처님이 지나가면 똥 푸는 사람은 늘 도망쳤다. 하루는 부처님이 불러서 물었다. "왜 도망가느냐?" "황송해서요" "뭐가 황송한가?" "제가 천민이라서요"

부처님이 말했다. "신분이란 건 많이 가지고, 힘 있는 사람들이 만들었을 뿐이다. 거기에 속지 마라."

이 말에 똥 푸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신분에 높.낮이가 없음은 알겠습니다. 그래도 제 직업은 천하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듣고 부처님이 말했다. "국왕이나 대신도 국민을 괴롭히면 천한 놈이고, 남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면 누구라도 고귀한 사람이다."

-이 일화는 무슨 뜻입니까.

"평등함을 알면 열등 의식도 풀립니다. 주위를 보세요. 지금 우리 사회에 직업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 것이 평등함을 깨치면 자신의 일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되죠. 이건 굉장한 것입니다."

-왜 굉장한 겁니까.

"자기 일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될 때, 그 일을 정말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럼 부와 명예는 물론, 인격까지 절로 따라옵니다. 그게 바로 순리죠.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돈만 목표로 삼고 있죠. 그래서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겁니다."

-이기주의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틀어쥔 '나'가 있어서죠. 사람들은 자신을 잡으려고만 하지, 놓으려고 하진 않죠. 자신의 존재 원리에 대한 오해에서 이기주의가 나옵니다."

-본질을 향하는 데 '선(禪)'만이 유일한 수행법입니까.

"꼭 선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선이 다른 수행과 다른 점은 남도 인정을 한다는 거죠. 간화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봉사 활동을 하든 말이죠. '선'만이 가능하고, 다른 수행법을 통해선 불가능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예를 든다면?

"중국의 육조 혜능 대사는 온전하게 본질에 드신 분이죠. 혜능 대사는 출가하기 전에 이미 상당한 경지에 있었습니다. '효(孝)' 수행을 했거든요. 홀 어머니를 모시며 순수한 마음으로, '나' 없이, 지극하게 효도를 했거든요. 그걸 통해 이미 문턱까지 가 있었죠. 그리고 출가 후 스승의 짧은 가르침으로 훌쩍 본질에 든 거죠."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기독교는 '전변설(轉變設)'이죠. 진리의 근원, 진리의 창구가 따로 있다는 거죠. 반면 불교는 '연기설(緣起設)'이죠. 근원의 자리가 어디에나 보편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는 너무 멀어서 사람들이 못 보고, 불교의 진리는 너무 가까워서 사람들이 못 보죠."

-부처의 자리를 '공(空)'이라고 합니다. '공(空)'이란 무엇입니까.

"부서지고 없어져 아무것도 없어서'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공'입니다. 본질과 형상이 동시에 있기에 '공'입니다. 이걸 이원론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겠죠. 그런데 이게 사실인데 어떡합니까."

-고행을 통해서만 그 자리에 가는 겁니까.

"불교의 수행은 고행이 아닙니다. 오히려 즐거움이죠. 갈수록 자기를 알고, 안 만큼 자유로워지는데 왜 고행입니까. 진리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 억지로 하려고 하니 '고행'이 되는 겁니다. 수행은 커다란 즐거움이죠."

해가 떨어졌다. 깊은 산, 뻐꾸기 울음이 크게 들렸다. 뜰에 서니 밤별도 크게 보였다. '졸졸졸'하는 개울물 소리도 밤새 쩌렁쩌렁했다. 선승의 가차없는 법문에 세상이 더 크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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