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예수 믿읍시다

샌. 2007. 6. 4. 09:05

출근하면서 골목길을 지날 때 가끔 한 할아버지를 만난다. 할아버지는 늘 같은 시간에 왼손에 쓰레기 봉투, 오른손에는 집게를 들고 아래서부터 올라오며 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잘 다녀 오세요. 예수 믿읍시다"라는 인사를 건넨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잘 다녀 오세요" 때문에 깜짝 놀랐다. 그것은 대문간에서 주로 가족으로부터 듣는 인사말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여러 차례 들으니 그것도 지금은 익숙해졌고, 이젠 목례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할아버지를 못 만나는 날이면 벌써 지나가셨나 하고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할아버지의 인사말은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항상 똑 같다. "잘 다녀 오세요. 예수 믿읍시다."

할아버지로부터 "예수 믿읍시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믿는다는 게 과연 무엇인지 자문해 보게 된다. 믿음을 라틴어로는 'fides'라고 하는데 원뜻은 '신뢰', '관계 맺음'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친구의 말을 믿는다고 할 때 거기에는 친구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 있음은 당연하다.그것은 한 인격과 인격의만남이다. 종교의 믿음도 마찬가지로 절대자와의 관계 맺음이며 그분께 온전힌 녹아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통용되는 믿음이란 것은 대부분 교리를 믿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신자란 교회 출석을 하고 절기를 지키고 성직자가 가르치는 것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기존의 세속적 가치관을 그대로 가진 채 신(神)을 단지 자신의 욕망 성취의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 조차 있다.

물론 신앙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하는 고민은 종교가 쇠락하고 있는 지금 - 여기서 한국은 예외지만 - 심각히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본질이 왜곡되고 망각된 결과로 유럽에서 기독교가사람들에게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오래지 않아 같은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구태의연한 낡은 교리를 가지고는 젊은이들을 이끌 수 없다. 젊은이들 취향에 맞게 예배나 미사 형식을 바꾼들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믿음은 단순히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일대일의 인격적 만남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절대자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근본적으로 자기 희생의 성격이 있다. 한 인격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묵은 세계관과 인생관이 송두리째 붕괴되는 것이며 세속적 가치관과의 완전한 절연이다. 즉 소아(小我)의 죽음을 통한 절대자에의 귀의가 믿음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한 인간의 통전적인 변화다. 신앙 행위를 통해 현세에서 복을 받거나, 내세에 천국으로 가려는 마음은 믿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도리어 그 반대로 자신을 낮추고 비워 작고 약한 존재들과 함께 하는 행위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가 간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함부로 쓰지 못한다. 믿는다는 행위의 엄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라고 큰소리 치는 사람들의 용기가 참으로 가상하게 생각된다. 오늘날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는 예수의 작은 흔적이나마 찾기 어렵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의 교회라고도 여겨지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영적 갈증에 시달리지만 아직까지는 기성 교회 체제에서 해갈을 맛보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일이야말로 내 인생 최대의 화두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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