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나침반

TAO[77]

샌. 2007. 3. 20. 15:20

타오의 움직임은

활시위를 당기는 것과 흡사하지요.

활시위를 힘 있게 팽팽히 당기려면

위쪽은 아래로 끌어내리고

아래쪽은 위로 끌어올려야 한답니다.

그것은

위의 남아도는 힘을 덜어 내서

아래의 부족한 힘을 채워 주는 것이지요.

타오의 넓은 마음은

남는 것을 덜어 내어

부족한 것을 채워 줍니다.

부유한 곳에서 덜어 내어

가난한 곳에 나눠 줍니다.

그래서 행복하지요.

하지만

사람의 좁은 마음은

부족한 곳에서 또 덜어 내어

남는 곳에 더 보탭니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집니다.

그러니 불행하지요.

다만,

타오와 함께하는 사람은

남는 것을 덜어 내어

부족한 것을 채워 주려고

노력한답니다.

또한 그는

이루어도 뽐내지 아니하고

성공해도 집착하지 아니하며

똑똑해도 드러내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행복하지요.

 

天之道, 其猶張弓與, 高者抑之, 下者擧之,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

天之道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孰能有餘以奉天下, 唯有道者.

是以聖人爲不恃, 功成而不處, 其不欲見賢.

 

하늘의 원리[天之道]와 세상의 원리[人之道]를 이만큼 간결하게 설명한 글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정확히 들어맞는 얘기다. 세계라는 하나의 경제시장으로 편입되는 이 시점에 탐욕스런 자본은 양극화를 더욱 부추기고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나라는 부유해지고 평균소득은 높아지지만 각 개인의 삶의 질은 추락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의 경제 체제가 없는 자의 희생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과 효율성이라는 기치 아래 힘 없고 약한 자는 막강한 자본의 군화발에 짓밟히고 있다. 그런 탐욕의 끝은 없다. 오죽 하면 옛말에 '문둥이 콧구멍에 마늘까지 빼간다'는 말이 있겠는가.

 

그러나남는 것을 덜어내서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하늘의 원리다.부유한 곳에서 덜어내어 가난한 곳을 채워주는 것이 하늘의 원리다. 동시에 그것이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의 기본 조건이다. 한자로 평화[平和]란 말이 모든 사람 입에 음식이 골고루 돌아가는 것이란 해석이 있다. 평등사회의 꿈은 이상에 머물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최소한 굶어 배 고파하는 사람은 없어야 제대로 된 세상이다. 병에 걸려서 치료를 못 받고 죽어가는 사람도 없어야 하고, 돈이 없어 교육을 못 받는 사람이 있어서도 안 된다. 아직 그런 세상이 도래하지 않았지만 그런 세상을 지향하며 나아갈 때 희망은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 세상이 나아가는 방향은 그와 반대되는 길이다. 그것이 나를 절망케 한다. 미국식의 경쟁과 자본의 원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사람들마저 그런 분위기에 세뇌되어 있다. 이런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팽배하게 된다. 남에 대한 배려나 예의는 찾기 힘들다. 오직 경제가 잘 돌아가고 경제성장이 되면 장밋빛 나라가 될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행복에의 길이 아니다.

 

짧은 소견이지만 내가 기독교를 접하고 깨달은 점은 성경을 통해 전해진 하늘의 메시지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희년을 비롯한 구약의 메시지도 가난하고 억눌린 자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역설하고 있다. 신약의 예수님에게서는 그것이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그분의 말씀은 단순한 비유나 수사가 아님이 그분의 생애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데 지금의 그리스도인은 어떠한가?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그 혜택을 누리며 부와 권력의 단맛을 보며살아가는 신자들은 그리스도교의 기본 정신과배치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지는 시스템에 일조하며 살고 있는 한 말이다. 고급 자가용을 타고 와 으리으리한 예배당에서 품위있게 찬송가를 부른다고 기독교 신자는 아니다. 아마 예수님이 보신다면 당시에 바리새인들을 향해 외치신 것처럼 "이 위선자들아!"하고 나무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이 사용하도록 창조하셨다. 따라서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공정하게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저 재화를 사용하는 사람은 합법적으로 소유하는 외적 사물을 자기 소유물만이 아니라공유물로도 여겨야 하며... 극도의 궁핍 속에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재산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취득한 권리를 가진다.' 이것은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결정된 사목헌장의 내용이다. 이 선언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본다.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바티칸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이 자신의 부와 권위를 버리지 못한다면 이 아름다운 선언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남는 것을 덜어내어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하늘의 원리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적선이 아니라 현 세계가 작동되는 시스템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지금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때다. 일상이 되어 버린 경쟁과 착취의 달음박질 대열에서 몸을 빼고 '스톱!'이라고 외치는 용기가 필요한 때다.즉, 맘몬이라는 우상에 대한 저항이다. 그것이 지금의 현실에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들의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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