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회심

샌. 2006. 7. 15. 12:24

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7 년 전 겨울이었다. 그때는 40대 중반부터 시작된 정신적 방황이 절정에 달했었다. 왜 사는가에 대한 의문,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질문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제 2의 사춘기라고 불러도 좋을 시기였다. 가톨릭 신자였지만 종교의 틀에서는 안식을 얻지 못했고, 머릿속은 온갖 상념들로 복잡했다.

 

그해 겨울, 세상을 떠나 그저 푹 쉬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다. 산 속 절이든 어디든 인적이 끊긴 곳에 들어가 있고 싶었다. 마침 아내가 S 수녀원의 피정을 소개해 주었다. 개인 피정이어서 아무런 간섭 없이 지낼 수 있다는 말에 책 몇 권을 싸들고 집을 나섰다. 주소만 들고 물어 물어 찾아간 곳이 지금의 터였다.

 

그런데 피정 기간 중에 예상치 않게 종교적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당시의 격렬했던 감정이 옛 일기에 남아있다. 그러나 종교적 체험이란 워낙 주관적인 것이라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하거나 공감하기가 어렵다. 내 자신이 지금 다시 읽어보아도 어떤 부분에서는 생뚱맞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에는 엄청난 정신적, 영적인 격변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 경험은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수 년간의 내적 방황의 결과가 그곳과 부딪치며 일어난 불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경험 역시 작은 봉우리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내가 거봉에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그곳 역시 수많은 작은 봉우리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하여튼 그때의 체험이 그곳을 앞으로 내가 살 터로 결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후반기 내 인생길을 또한 결정지었다. 결과적으로는 남들이 가지 않는 힘들고 고된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고 옛일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자랑스러운 경험, 내 인생을 넓혀주고 풍요롭고 해 준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비록 대가는 쓰고 아팠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새로운 시도나 모혐을 해 보게 된 것이다.

 

이제 이만큼 나이가 들고보니 한 순간에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것에는 무언가 경계할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안다. 속된 말로 뿅 간다고 표현하는 -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믿음이든 그 무엇이든 - 사람의 혼과 넋을 앗아가는 것에는 마땅히 더욱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무엇을 합리적이고 단단한 바탕 위에 건설하기 위하여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때의 일기을 펴면서 내 인생에서 일어났던 한 소용돌이를 다시 돌이켜 본다. 그리고 그립고, 아련하고, 동시에 쓸쓸한 심정이 된다.

 

지나간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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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99(12/1) 월 맑음


꿈을 꾸다. 莊子(?)가 비유법을 써서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준 것 같다. 철학적 내용의 이런 꿈은 처음이다. 오전에 산에 다녀온 후 여주로 출발하다. 여러 가지로 챙겨주고 신경 써 주는 아내에 감사한다. 홀로 떠나는 개인 피정, 기분이 착잡하다. 주변 풍경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벗어나려 나선 길인데 도리어 무거워지는 것은 왜일까? 15:30, 수녀원에 도착하다. ‘한적한 곳에서 함께 좀 쉬자’ ‘침묵’이라는 글자들이 이 곳 분위기를 전해준다. 방을 배정받고 간단한 안내를 받다. 첫 인상은 고요함이다. 너무나 조용하다. 저녁 식사 시간에도 이어지는 침묵과 조심스런 분위기, 그 과정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 간소함, 경건함. 그리고 직접 해야 하는 설거지도 인상적이다.수녀님과 간단히 면담하다. 돌아와 책을 조금 보다가 일찍 자리에 눕다. 방이 추워서 긴 팔의 옷을 두 개나 껴입다. 불만보다는 내 집에서의 따뜻한 난방이 도리어 죄스러워진다.


1/19/99(12/2) 화 흐림


잠자리가 설어서인가 수없이 깨었다 잠들었다를 반복하다. 요한복음과 키요자와의 글을 읽다. 키요자와는 말한다. ‘우리의 참된 자아[眞我]란 다른 게 아니다. 全實存을 無限者의 놀라운 섭리에 맡기고, 그리고 자신을 현재 상황에 있는 그대로 가만히 두는 것이다’라고.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無限者에 대한 체험이 없다. 그저 머리로만 알 뿐이다.

13:00, 수녀님과 대화하다. 수녀님 권유에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기도문을 읽다. 제 12처, ‘예수 숨을 거두시다’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것은 나 자신이어야 함을 강하게 느끼다. 그리고 제 14처의 ‘예수 부활하시다’에서 새로 태어남의 신비를 생각해 보다. 아래와 같은 기도문의 맺음말에 감동을 받다.


순간 순간 네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위에

내 표지가 찍혀 있음을

굳게 믿고 신뢰하면서

네게 다가오는 매 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단순한 신앙, 이것만 있으면 된다.

가슴에 대고 속삭이라.

“주님, 저는 원합니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나를 먼데서 찾지 말라.

나는 바로 네 옆에 있다.

너의 작업대

사무실

부엌이

네가 사랑을 바치는 제대이다.

그리고 내가 거기 너와 함께 있다.

이제 가라.

네 십자가를 져라.

그리고 네 삶으로

너의 길을 완성하여라.


산을 오르며 하느님께 기도하다. ‘나를 비워 주시고, 당신으로 채워 주십시오’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스승으로 따르며, 그를 통한 신앙생활을 시작하기로 하다. 이 곳, 이 시간이 내 진실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원한다. 마침 검은 먹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온다. 산들이, 아래 마을이 환해진다. 그러나 다시 먹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이 불어도 나는 행복할 것 같다.


사랑하는 당신에게[Ⅰ]

이 곳 피정의 집에 온지 꼭 하루가 지나가고 있소. 출발할 때 아파트 현관에서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던 당신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오. 점심 식탁에서 당신이 그랬지. 마치 어린 아이를 멀리 떠나 보낼 때처럼 걱정스럽다고. 사실 내 마음도 무척 착잡했었다오. 혼자서 시골도 자주 다닌 터라 홀로 떠남이 익숙하건만 이번은 그렇지 않았소.

이 곳은 너무 조용해서 말 그대로 避靜을 즐기고 있소. 종교 서적을 읽고, 산길을 걷고, 생각을 하고 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요. 역시 침묵 피정 온 신학생들과 수녀 몇 분이 같이 생활하고 있소. 비록 식사 시간에만 만나지만 - 그것도 일절 대화는 없고 - 일반인은 나 혼자라 너무 엄숙한 분위기에 약간은 주눅이 들어 있다오. 당신과 전화 통화를 했던수녀님과 어제, 오늘 한 차례씩 대화를 나누었소. 걱정해 주는 마음이 고마울 따름이오.

오후에는 수녀님 권유대로 십자가의 길 14처를 지나며 기도문을 읽고 묵상해 보았소. 그 중 12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어떤 느낌을 받았다오. 예수님의 길을 따름으로써 새 생명의 부활로 이어져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의미도 내 나름대로 이해해 보게 되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야 할 이 ‘나’라는 덩어리가 왜 이리 크고 무겁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소. 아직은 뭔지 잘 보이지 않지만, 약간은 두려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의 길에 내 발을 옮겨 놓으려 하오. 그러나 이런 고조된 마음이 한 순간 감정의 유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또 새로운 길에 대한 두려움으로 다시 뒷걸음질치는 나를 보게 되는구려. 이것이 인간의 약함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오만함 때문인지 모르지만, 나를 버리기가 이렇게 힘들고 나에 대한 집착이 이렇게 큰 줄을 이제야 실감하게 되오. 기도문 맺음말의 한 구절을 다시 읽어보며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사고 하느님께 빌어야겠소. ‘단순한 신앙, 이것만 있으면 된다. 가슴에 대고 속삭이라. “주님, 저는 원합니다. 하겠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소. 산골이라 해가 일찍 지는 것 같구려. 진작 밖은 어둑해졌는데, 온전히 종교적 분위기에 젖을 수 있었던 오늘 하루에 감사하게 되오. 귀한 시간 헛되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겠소.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 32


<깨어 있음 >

우리의 삶을 완벽하고 튼튼한 토대 위에 세우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튼튼한 바탕 없이는 우리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될 것이다. 그것은 구름 위에서 곡예를 부리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재주넘기다. 곡예사들은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다.

사람이 어떻게 완벽하고 튼튼한 토대를 마련할 것인가? 내 생각으로는 無限者(the Infinite) 또는 絶對者(the Absolute)와 만남을 통해서만 거기에 이를 수 있다. 무한자가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그런 것은 생각해 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무한자는 그를 찾는 자가 발견하는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무한자가 안에 있다 또는 밖에 있다 하고 정의내릴 수 없다. 무한자를 만나지 않고서는 누구도 든든한 토대 위에 설 수가 없다. 그것을 통하여 완벽하고 든든한 토대를 얻게 되는 內的 발전의 과정 -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정신적 깨어 있음(spiritual awareness)’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깨어 있음’은 스스로 충분히 만족함(contentment)을 뜻한다. 깨어 있는 사람은 사물이나 사람을 추구하다가 낙담하거나 실망하는 일이 없다. 어쩌다가 밖에 있는 對象을 추구하게 되어도, 무엇이 부족하다는 느낌에서 하지는 않는다. 깨어 있는 사람이 어찌 不滿을 느끼겠는가? 그는 사물과 사람의 유한하고 제한된 세계가 아닌, 無限者 안에서 만족을 찾는다.

그러나 깨어 있음이 우리로 하여금 주변 세계에 무관심한 존재가 되게 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선명하게 깨어 있을수록 우리는 낙담하거나 실망하는 일 없이 사람들을 상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모든 체험을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의미있는 부분으로 바꿀 수 있다.

‘깨어 있음’은 ‘絶對 自由’를 누리는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가 겪는 장애는 모두가 스스로 만든 것이지 남들이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다. 남에게 절대 자유가 있듯이 우리에게도 절대 자유가 있는데 그들의 자유와 우리의 자유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이것이 깨어 있는 사람으로 사는데 필요한 理想的 인간 관계다.

깨어 있는 사람은, 모든 고통을 그릇된 견해에서 생겨나는 幻覺으로 보아야 한다는 불변의 원리를 언제나 기억한다.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남에게 고통을 주는 원인이 아니듯이 남도 나에게 고통을 주는 원인이 아니다. 비록 남의 손에 고통을 당하는 때가 있지만, 깨어 있으면 그 모든 고통이 나의 그릇된 견해에서 오는 것임을 보게 된다. 우리가 맑게 깨어 있을수록 그릇된 견해로 말미암은 고통은 사라질 것이고 우리는 든든한 토대 위에 설 것이다.

우리는 삶의 모든 순간 순간에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 속에 모든 것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最上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바깥 사물이나 사람을 추구하는데서 오는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 깨어 있음은, 평화스런 협력을 통하여,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킨다. 완전한 자유(perfect freedom)와 완전한 굴종(perfect submission)은 적대적이 아니다. 둘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충돌하지 않는다. 그런 자유를 즐겨 누릴 때 우리는 자신과 남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고통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信心의 조건 >

이 짧은 글에서 나는,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 종교적 신심(religious conviction)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信心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그것을 위한 근본 조건들에 관하여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서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일에 실패하는 경우가 있음을 자주 본다. 무엇이 信心을 얻기 위한 근본 조건인가?

신심을 얻고자 한다면 종교 그 자체 말고 다른 무엇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 자신의 경험을 미루어서 말하는 것이다. 재물, 가족, 친구, 부모, 형제, 자매, 경력, 능력, 교육, 지식, 국가 따위를 문제삼아서는 안 된다. 그것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완전 독립하기까지는 信心을 얻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게 좋다. 또한 우리는 가정, 재산, 가족을 등지고 떠나는 세상 포기의 힘든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신심을 얻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信心이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인간을 초월하는 힘[他力]을 의존함으로써 얻게 되는 內的 평안이 곧 신심이다. 그동안 종교에 무관심해 온 사람이 종교적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인간 세상에 대한 迷妄에서 깨어났다는 표시다. 그는 두 마음을 품고 있다. 한편으로는 세상에 대한 미망에서 깨어 났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묶여 있다. 그것은 마치 한 발은 앞으로 나가려 하고 다른 한 발은 뒤로 물러서려는 것과 같다. 어떻게 하면 그가 스스로 굳건히 설 수 있을 것인가?

종교는 이 세상에서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따라 가야 하는 그런 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너머로 가서 닿는 길이다. 그 길을 가려면 세상 모든 것에서 독립되어야 한다. 그 길을 실제로 걸어간 사람은, 이 세상을 의존하면서 신심을 얻을 수 있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자가당착이다. 신심을 얻고자 진지하게 마음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자기 노력에 대한 모든 의존에서 떠나야 한다.

부처님의 자비로우신 빛으로 눈이 밝아질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싫어하거나 멸시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든 것이 사랑하고 공경할 만한 것들이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모두 제 빛을 내뿜는다. 그렇게 되면 삶은 온통 樂觀으로 채워지고 세상은 가장 훌륭한 가능성 자체가 된다. 內面의 自足에 이르는 것이 信心의 頂点이다. 그 자리에 설 때, 처자식의 존재가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으며 그들이 죽는다 해도 못 견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생선을 즐겨 먹지만 생선이 없다 해서 불평하지 않는다. 재물을 즐기되 그 모든 재물이 없어져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높은 벼슬자리에 앉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 아까워하지 않는다. 지식을 탐구하되 남보다 더 안다 해서 뽐내지 않고, 남보다 덜 안다 해서 주눅들지 않는다.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산 속에서 밤 하늘 별을 보며 잠자리에 드는 것을 경멸하지 않는다. 좋은 옷을 입지만 그 옷이 더러워지고 찢어져도 태연하다. 이와 같은 品性을 지녔기에 信心을 얻은 사람은 自由人이다. 아무 것도 그를 가두거나 가로막지 못 한다.


1/20/99(12/3) 수 맑음


수녀님과의 대화 시간에 내 심경의 일단을 피력하다. 그러나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신앙면에서는 또 뒤로 한 발 물러선다. 내가 복잡해서인가? 아니면 순수하지 못해서인가? 마음과 마음은 말로 만나지 않는다. 인간 사이에서 지식이란 한낱 껍데기일지 모른다. 선한 바탕과 선한 품성만이 인간을 감명시킨다. 소박하고 부담감 없이 대해주는 수녀님에게 감사한다.

이 곳은 지금 모두들 용맹정진 중이다. 신부가 되려는 신학생들과 종신서원을 눈앞에 둔 수녀들의 치열함 사이에 끼여, 제대로 알지도 못 하는 내가 그저 흉내나 내며 천방지축 까불고 있다. 그러나 프로들 가운데에서 아마추어 혼자, 외로운 사람만이 느끼는 행복감도 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로마서 1:17 >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로마서 3:22-24 >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 <로마서 4:5 >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로마서 5:1 >


예전의 우리는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로마서 6:6 >


오전에 로마서(1-6장)를 읽으며 감명을 받다. 내 마음은 감사와 희열에 차 있다. 眞理가 이리 단순하고 간단하다니! 로마서에 반복해 나오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구절에서 작은 깨침의 실마리를 잡다. 인간의 원죄는 하느님과의 분리를 뜻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원죄로서의 나[自我]의 죽음과 나의 부활이다. 이 사실을 믿는 것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하느님과의 합일이 이루어진다. 단지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 해방, 자유를 얻을 수 있다니, 이것이 福音이고 信仰의 神秘가 아니고 무엇인가?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어지는구나. 오직 믿음뿐이네. 감사하고 찬양드려야 할 일이 아닌가? 내가 할 수고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다 져 주셨다는 이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오후가 되면서 오전의 고조된 감정은 차차 가라앉아 간다. 도리어 한 쪽에서는 ‘바보야, 그런 걸 믿으려고 하느냐? 그건 망상이다’라고 속삭이는 소리도 들린다. 다시 ‘십자가의 길 14처’를 걸어 올라가며 신앙이란 매일 매일 져 나가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다. 단순한 열정이나 감정이 신앙이 아니야. 그건 한 여름의 소나기와 같이 오래 지속될 수가 없어. 신앙은 매일 매일 싸워 나가야 할 自己 否定의 길이야. 頓悟 보다는 漸修인 것이야. 그러니까 이제 첫 걸음을 내 디딘 거라구. 나는 기도한다.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인간의 머리로 당신을 헤아리려는 오만을 꺾어 주소서. 바른 길로 인도해 주소서.


키요자와의 글을 읽으며 많은 것을 배운다. 그의 표현인 ‘자아를 초월한 힘’이나 ‘如來’는 ‘하느님’에 다름 아니다.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 그것은 眞理의 大海이다.


하루에도 여러 번씩 종교적 들뜬 감정에 빠지다가 다시 냉정으로 돌아온다.


저녁에는 ‘聖 프란치스코’ 비디오를 보다. 나의 洗禮名 성인이라고 수녀님이 테이프를 이웃 성당에서 빌려 오시다. 프란치스코에게서 하느님과의 만남은 일종의 狂氣라고 느낄 정도로 특이하다. 복음적 삶을 직접 실천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과격함일지 모른다. 나에게서 하느님과의 만남은 어떤 변화를 생기게 할까?


옆방에 신부님이 새로 피정을 들어오시다. 밤이 되자 소음이 새로 생겼다. 아마도 코골이를 심하게 하시는 신부님인가 보다.


사랑하는 당신에게[Ⅱ]

사흘째 되는 이 곳 생활도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있소. 지내는 것은 대단히 만족스럽다오. 이런 환경이 내 성격과 잘 맞아서인지 하루 내내 종교적 생각에 푹 빠져 지낸다오. 전혀 다른 잡념 없이 이렇게 온 종일 한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이유는 이 곳의 경건한 분위기 때문인 것 같소. 특히 식당에서 함께 식사할 때에는 옆에는 전부 신학생들과 수녀들이라 마치 백로들 사이에 까마귀 한 마리 섞여 있는 것 같아 혼자 푹하고 웃지 않을 수 없다오.

오전에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가슴이 찡하는 느낌을 받았소. 계속해서 강조되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라는 구절에 마음이 끌리었소. 이제껏 내가 추구하던 것도 결국 같은 것이었는데, 그리스도교에서 얘기하는 핵심을 이제야 내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것 같소. 그것은 예전에 다 읽었고 들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전혀 새로운 것으로 나에게 비치고 있소. 眞理한 것이 이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건지, ‘福音’ ‘信仰의 神秘’라는 말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오.

물론 당신은 신앙의 초기 단계에서 이런 것을 이미 경험했을 것이라고 믿소. 느낌이나 단순한 감정만으로 이것이 신앙이구나 하고 자기 만족하는 것을 경계하오. 종교적 엑스터시의 허구는 나도 많이 보아온 사람 중의 하나라오. 그래도 나의 이 느낌은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어떻게 현실적인 생활과 연결시켜 나갈까 자문해 보는데 솔직히 자신이 없소. 용기가 없다고 해야 할까, 인간적인 생각으로 말하자면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의 모습은 아직도 나에게는 멀다오. 그러나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소. 돌아가서는 아마도 당신의 도움을 받아야 될 것이요. 기도하는 방법부터 배우며 시작해 보고 싶소.

내가 너무 골치 아픈 사람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소. 당신이 자주 하는 말대로 어린아이같이 단순하지 못하니까 그런지도 모르는데, 오늘 수녀님한테서는 왜 그리 삭막하냐고 핀잔도 받았다오. 나의 성향이 그러할진대 내 신앙생활에 일반의 기준대로 해서 크게 기대를 하지는 말기 바라오. 그래도 내 나름대로의 신앙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다오.

여보, 이런 딱딱한 얘기만 해서 미안하오. 당신이나 아이들에게 잘못하는 게 많다는 것도 알고 있소. 만약 나에게도 진실한 신앙이 찾아와 준다면, 그런 신앙의 성장과 함께 내 마음씀이나 생활도 변화할 것으로 믿고 있소.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로마서 13:8 >


여러분에게 어떤 신념이 있다면 하느님 앞에서 각각 그 신념대로 살아 가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로마서 14:22 >


<‘자아를 초월한 힘’(Power beyond Self)을 통한 해방 >

내가 ‘자아를 초월한 힘’을 통한 해방을 알고 있을 때,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분명해 진다. 내가 ‘자아를 초월한 힘’을 통한 해방을 잊고 있을 때,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불확실해 진다.

내가 ‘자아를 초월한 힘’을 통한 해방을 알고 있을 때, 욕망으로 인하여 곁길로 빠지는 일이 거의 없다. 내가 ‘자아를 초월한 힘’을 통한 해방을 잊고 있을 때, 자주 욕망에 눈이 멀게 된다.

내가 ‘자아를 초월한 힘’을 통한 해방을 알고 있을 때, 내가 하는 모든 일을 빛이 비추어 준다. 내가 ‘자아를 초월한 힘’을 통한 해방을 잊고 있을 때,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어둠에 묻혀 버린다.

오, ‘자아를 초월한 힘’을 통한 해방이여! 그것에 대한 깨어있음이 나를 이 迷惑과 고통의 세상에서 자유롭게 하는구나. 나를 이끌어 평화롭고 고요한 淨土에 들게 하는구나.


<나의 종교적 信心 >

첫째, 믿고 의지함으로써 실제로 얻는 혜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믿고 의지함으로써 고통과 절망에서 건짐받는다고 대답하겠다. 그것을 건짐받는 은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순간 그것은 내 모든 절망과 고통을 몰아내고 곧장 나에게 고요와 평화를 안겨준다. 이 믿음이 내 안에서 생겨날 때 그것은 迷惑과 그릇된 견해 따위를 위한 여지가 남아있지 못하도록 내 마음을 완벽하게 점령한다. 아무리 짜증스런 상황에 처해 있어도 이 믿음이 내 마음에 있는 한 절망과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때로 나는 신앙적 感謝에 대하여 말한 바 있다. 내가 말하는 신앙적 감사란, 나의 信心이 실제로 절망과 고통에서 나를 건져주었을 때 경험하는 즐거움을 뜻한다.

둘째, 내가 如來를 믿고 의지하는 것은 단순히 그에 따르는 혜택 때문만이 아니라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다. 나는 내 知力(intellect)에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如來를 믿고 의지한다. 아직 철 들기 전,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던 시절을 제외하고 나는 항상 내 인생의 의미를 알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품고 살았다. 그 탐색의 결과, 마침내 나는 인생의 의미를 머리로 헤아려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결론이 나를 이끌어 如來를 믿고 의지하게 했다. 이제 信心을 가지게 된 지금, 자기 노력이라는 것이 참으로 쓸모없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나는, 그와 같은 노력의 쓸모없음을 인식하는 자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방법을 다 써서 知的 탐구를 계속해야 했다. 그것은 지극히 고통스런 과정이었다. 아는게 아무 것도 없는 나의 완벽한 無知를 깨달았을 때 나는 모든 것을 如來께 내어 맡기게 되었다. 이것이 내 종교적 信心의 알속이다.

셋째, 如來는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實體(reality)이다. 나는 그 분을 믿고 의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믿고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如來란 그를 통하여, 있는 그대로의 나의 삶을 살 수 있는 힘의 근원을 뜻한다. 나는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 행복과 불행을 분별 못한다. 그런 사람이 내가 믿고 의지하는 분, 如來라고 부르는 힘의 근원에 의하여 이 세상을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신뢰없이 나는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한다. 나로서는 如來를 믿고 의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것이 내가 믿고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如來다.

그런즉 나의 종교적 신심이란, 한 없이 자비롭고 한 없이 지혜롭고 한 없이 힘 있으신 분의 實在에 대한 신심, 바로 그것이다.

첫째, 如來께서는 한 없는 자비신지라, 그를 믿고 의지하게 되는 순간 평화와 고요함을 누리게 하신다. 죽은 뒤 저승에 갈 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내가 믿고 의지하는 如來께서는 이 세상에서 누릴 최대 최고의 행복을 이미 내게 주셨다. 그 무엇도 如來를 믿고 의지하는 信心이 주는 것 만큼 큰 행복을 주지는 못한다.

둘째, 如來께서는 한 없는 지혜신지라, 나를 깨우쳐 주시고 내 무지에서 오는 어둠을 몰아 내시고 나를 착각과 그릇된 견해에서 건져내심으로써 언제나 한결같이 지켜 주신다. 나는 온갖 종류의 주제넘은 識見을 지니고 살았다. 그러나 시방 나는, 나 또한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한 자라는 사실에 만족한다.

셋째, 如來께서는 한 없는 능력이신지라, 나의 종교적 信心을 통해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능력을 넉넉하게 부어 주신다. 나는 불가능한 짐에 눌려 많이 괴로워했다. 그 불가능한 짐을 지고 견디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없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자살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그 고통에서 나를 건져주었고, 이제 나는 한 없이 자비로우신 如來를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평화롭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如來의 능력은 무한하시다. 그 분의 놀라운 능력에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써 나는 더 없는 평화와 안락을 누린다. 生死의 문제를 그 분께 의탁함으로써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않고 不平하지도 않는다.


1/21/99(12/4) 목 갬


까치 소리, 참새 소리, 또 다른 산새들 소리로 하루가 시작된다. 깨끗한 하늘과 상쾌한 공기, 창턱에 손을 걸쳐 턱을 고이고 아름다운 아침 풍경을 본다. 바로 앞산의 나무들은 하얀 서리를 이고 있다. 그 뒤로 성당 종탑의 십자가와 수도원 건물이 보이고, 멀리 산 아래에는 작은 마을이 포근히 앉아 있다. 구름도 어느 새 사라지고 아침 해가 산 능선 위로 얼굴을 내민다. 아, 행복한 아침이다.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나’[自我]를 버리는 것, ‘나’를 죽이는 것이 宗敎의 핵심이라고. 석가모니는 스스로의 힘으로 ‘나’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 ‘空’이라는 것을 깨쳐서 핵심에 도달했다. 그러나 성서는 말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다고,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하느님의 은총에 인간이 할 일은 감사밖에 없다. 내게 진실한 믿음이 있다면, 나는 엄청나게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가로막는 오래된 習氣가 있다.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면 한 순간의 回心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순례자의 발걸음일지 모른다. 조금씩 조금씩 ‘나’를 죽임으로써 - 나의 힘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 조금씩 조금씩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오늘 따라 구름의 변화가 심하다. 맑던 하늘이 순간적으로 구름으로 덮이고 이내 곧 벗겨진다. 諸行無常, 그렇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 내 마음은 그 어느 것보다 더 변화무쌍하다. 이런 마음에다가 내 삶의 바탕을 두는 어리석은 짓을 하며 이때껏 살아왔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려는 짓도 역시 어리석음이다. 몇 몇 종교적 천재의 흉내를 내면서 自高하고 자만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온전히 절대자에게 바쳐야 함을 받아들인다. 이제는 항복을 하는 수밖에 없다. 어제 본 비디오에서 아씨시의 主敎 앞에서 한 프란치스코의 자신있는 말이 언젠가는 나의 입에서도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에는 나는 장님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빛이 나에게 비치어 지금은 나는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이런 느낌들이 宗敎的 回心에 해당된다면, 그 계기는 어제 로마서 1장에서 6장을 읽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오늘 그 부분을 다시 읽어본다. 비슷한 감동과 감사함을 느끼면서.


그러면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죽어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 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 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 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예전의 우리는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 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서 6:1-11 >


가장 경계할 것, 그것은 편협된 믿음에 빠지는 것이다. 믿음은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은 여유이다. 분별하고 가르는 것은 진실된 믿음이 아니다. 一身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도 진실된 믿음이 아니다. ‘믿음의 축복은 매일 죽을 지경의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미소 지으며 삶을 觀照할 수 있다는데 있다. 이런 믿음은 분열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和合으로 나아간다. 믿음은 생명의 원천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 열락은 행복감을 안겨주는 것이다’(요셉 빌). 불교도 노자도 장자도 ‘기타’도 다 아우를 수 있는 넉넉한 믿음을 갖고 싶다. 지금 나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들, 詩나 사진이나 그 모든 것들이 신앙으로 더욱 아름다운 의미를 띄게 되는 그런 믿음을 갖고 싶다. 진실된 믿음은 한 세계의 닫음을 요구하지 않고, 도리어 내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그런 은혜임을 확인하고 싶다.


진실한 믿음이란, 그 마음속에 私가 없이 오직 하느님만 모시고 사는 사람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사람에게 어찌 개인적 욕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일에 어떤 집착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느님이 버리라고 하면 못 버릴게 또 무엇이 있겠는가?


식사를 하면서 옆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본다. 신학생들과 수녀들, 아리따운 젊은이들을 그들의 전부를 바쳐 평생 하느님을 따르게 하는, 이 信仰이란 무엇인가?


내가 왜 여기에 왔는가? 결코 종교적 싸움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는데, 서울을 떠나 그냥 편히 쉬러 왔는데, ‘唯須息見’이라고 잠시나마 ‘본다는 것’을 쉬고 싶어서였는데, 엉뚱하게 왜 이리 신앙적으로 몰두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내가 듣는다면 이런 것도 다 神의 섭리라도 얘기하리라. 그 무엇이든지 간에 이 곳에서 나에게 일어난 어떤 변화를 감지한다. 그것은 내 안으로 떨어진 한 알의 작은 씨앗이다.


앞길을 지나가는 장사꾼의 스피커 소리가 닫힌 창을 넘어 가늘게 들린다. 무엇을 사라고 하는 걸까?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듣는 생활의 소리이다. 문득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내 가족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다시 서울에 올라가 사람들 사이에서 피곤해질 때, 어떻게 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주위의 모든 것에 감사하고 싶다. 특히 이 곳에서 같이 생활했던 분들에게 감사한다. 앞으로 聖職을 맡게 될 젊은이들, 비록 식당에서만 만나고 얘기 한 마디 나누지 못했지만 그들의 얼굴은 내 동생의 얼굴이고, 사랑하는 이의 얼굴이다. 또수녀님, 상담해 주고 걱정해 주신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에 감사한다. 그 분의 말씀은 큰 힘이 되었다. 그 외 만난 사람들, 내 신앙이 앞으로 성장한다면 그 싹은 이 분들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 감정이 자꾸 고조됨을 느낀다. 이럴 때 기록을 하게 되면 차분하게 마음을 달래며 생각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가 있어서 좋다. 또 하나는 훗날 경계의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그 위치에서 자신을 보는 한 자신의 유치함을 알아보지 못 하기 때문이다. 뒷날 더 높은 곳에 올라가서 지금의 나를 내려다 볼 때, 스스로 오만에 빠질 위험이 줄어들지 않겠는가?


신앙의 길에는 수많은 깨달음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제 그 途上에 첫 발을 내디뎠다. 지금의 나는 마치 넓은 바다에서 작은 고기 한 마리를 낚아 올리고 즐거워하는 어린 아이와 같다.


젊은 시절 교회에 다닐 때,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노이로제가 있었다. 입으로는 ‘예’하고 외치지만, 문을 나서면 가슴은 허전했다. 신앙이란, 헝클어진 흙탕물이 차차 맑아져 가는 과정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저녁 식사 후에수녀님과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다. 요 며칠간 가까이서 본 수녀님들의 화장기 없고 거친 피부의 얼굴, 인간적으로는 애처롭지만 그러나 경건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사랑하는 당신에게[Ⅲ]

이 곳에 올 수 있도록 도와준 당신에게 다시 감사하오. 나를 돌아보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당신의 덕분이오.

오후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하였소. 숙소 앞으로 나가서 논둑길을 따라 개울까지 나가 보았는데, 두 수녀원이 이웃 동네와 어울려 산 아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있었소. 이 곳은 아직 교통이 불편한 곳이라 그런지 우리나라 어딜 가나 시끌벅적한 개발의 짓거리가 없는 아주 조용한 고장이라오. 정말 한 번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구려. 저쪽 산 아래쯤 집을 짓고 산다면 좋겠다고 행복한 공상을 해 본다오.

저녁이 되니까 앞마당으로 많은 까치들이 모여들고 있소. 둘이서 장난을 치기도 하고, 무엇이 좋은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바쁘게 날아다니는 저 놈들의 날개짓을 바라보는 것만도 즐거운 일이라오. 저 작은 새 한 마리의 樂, 美, 無爲. 무거운 생각은 애써 피하려고 하는데 저 놈들이 또 나를 自省하게 만드는구려.

현실적인 신앙생활에서는 서울에 올라가는 데로 고백 성사를 볼 것이오. 그리고 信者로서 필요한 것이면 당신의 요구대로 할 생각이오. 다만 구역 모임을 포함해서 활동은 당분간 사양하겠소. 지난 번 카세트를 들으면서 비판했던 그 신부님의 논리를 내 변명으로 대신해야겠소. 그 쪽에는 당신이 잘 이해시켜 주구려.

이제 이 곳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어가고 있소. 조금의 잡념이 들 여지도 없이 오직 한 생각에 몰두하며 지낸 것이 내가 생각해도 믿겨지지가 않소. 그러면서도 즐겁게 보내었소. 당신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하오.


1/22/99(12/5) 금 흐림


흉한 꿈에 시달리다. 새벽 미사에 나가다. 10여명의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기. 강론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이다. 앞자리의 여자는 미사 시간 내내 울고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었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싹은 곧 나왔지만 흙이 깊지 않아서

해가 뜨자 타 버려 뿌리도 붙이지 못한 채 말랐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 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마태 13:3-8 >


미사 후에 첫 고백 성사 보다.

역사상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臨在하시는 그리스도, 지금도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그리스도.


자기가 하느님 안에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요한1 2:6 >


산에 올라 ‘스승 예수의 상’ 앞에 잠시 앉아 있다. 回頭, 참 적절한 말이구나. 나는 지금 그를 향해 머리만 돌리고 있다.


緣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이 곳에 온 것이, 새로운 만남을 가진 것이.


避靜을 끝내며, 가슴에 새기는 한 마디 ⇒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귀가하다. 가는 길과 오는 길이 같은 길이건만, 같은 길이 아니다. 집에 오니 아내가 장미꽃과 카드로 반갑게 맞아 준다. 피정의 집에서 사 온 선물을 전해 주다. 그저 멍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한 바탕 몸살을 앓고 난 뒤의 개운하면서도 멍한 상태라고 할까? 아니면 가던 길을 갑자기 잊어 먹은 어린 아이의 멍해 있는 상태라고 할까?


† 찬미 예수

피정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되었음을 축하드립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기쁨을 함께 나누길 기원해요.

사랑합니다.

- 프란치스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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