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종교 신념 환자

샌. 2006. 6. 22. 14:43

이 시대의 가장 반종교적인 과학자라면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아닐까 싶다. 우리들에게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생물학자인데, 종교와 종교적 신념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며 과학적 사고로 세상을 보기를 강조하는 과학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종교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그러나 새겨들어야 할 부분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종교인들이면 그의 비판에 한 번쯤 귀를 기울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종교 교리를 정신 바이러스에 비유하고, 종교인을 잘못된 신념 환자들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있어 종교 활동이란 정신적 사기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미숙한 정신이며, 아직도 청동기 시대를 살고 있는 어리석은 정신이다. 그는 9. 11 테러로 상징되는 종교적 광기를 가장 혐오한다. 그의 유물주의적 사고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가 의사 입장이 되어 ‘종교적 신념 환자’의 증상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 내용은 한 번 음미해 볼 만하다.


1. 환자는 대개 어떤 것이 참이거나 옳거나 고결하다는 내면의 확신에 따라 행동한다. 그 확신이 증거나 이성에 기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것이 대단히 압도적이며 설득력 있는 것이라고 느낀다. 우리 의사들은 그런 믿음을 ‘신념’이라고 부른다.


2. 환자들은 대개 신념이 증거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음에도, 그 신념에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긍정적인 미덕을 부여한다. 사실 그들은 증거가 적을수록 그 믿음이 더 고결하다고 느낀다. 증거 부족이 신념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이 역설적인 개념은 스스로 유지되는 프로그램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기 준거적이기 때문이다. 한번 믿음을 얻은 명제는 자동적으로 반대 주장들을 억압한다.


3. 신념 환자에게 또 하나 나타날지 모르는 관련된 증상 하나는 ‘수수께끼’ 그 자체가 좋은 것이라는 확신이다.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오히려 수수께끼 자체를 즐겨야 하며, 더 나아가 그 해결 불가능성을 만끽해야 한다.


4. 환자는 경쟁 신앙을 용납하지 않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심하면 그들을 죽이거나 죽여야 한다고 선동할 수도 있다. 그는 배교자들이나 이단자들에게도 비슷하게 호전적인 태도를 취할지도 모른다. 또 그는 항바이러스 소프트웨어와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는 과학적 추론 방법 등 자기 신앙과 불화를 빚을 가능성이 있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적의를 느낄지 모른다.


5. 환자는 자신이 품은 특수한 확신들이 증거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해도 전염학에 크게 빚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지 모른다. 그는 궁금해 할지 모른다. 나는 왜 저 확신 집합이 아니라 이 확신 집합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당신이 종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출생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그토록 열렬히 믿는 확신들은 당신이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전혀 다르고 대개 양립할 수 없는 확신 집합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6. 환자의 내면 감정은 놀랍게도 성적(性的)인 사랑과 관련이 깊은 감정들을 떠올리게 한다. 성적인 사랑은 뇌에서 대단히 강한 힘을 발휘하며, 몇몇 바이러스들이 그것을 활용하는 쪽으로 진화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아빌라의 성 테레사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어서 굳이 인용할 필요도 없는, 오르가즘이 수반된 환상을 보았다.


종교 또한 비판에 대해 열려있어야 하고 어떤 충고나 비난에 대해서도 자기 발전과 성숙을 위해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위와 같은 디킨스의 말에도 신앙인 각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디킨스가 비난하는 외곬 신앙, 즉 광신으로 가는 오류를 막아줄 것이다.


오히려 위에 나오는 디킨스의 진단은 나에게는 온건한 것으로 비쳐진다. 소위 종교적 환자들의 증상은 그 밖에도 더 많이 경험하기 때문이다. 자기도취와 자기중심성, 신비로의 도피, 자기 학대, 현실 회피, 성별(聖別)에 대한 자부심 - 그러나 내가 볼 때는 사는 것이 전혀 세속인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 등이 있다. 사실 이것들은 과거에 내가 빠졌던 오류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은 일부 근본주의자들의 성경의 무오류성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일체의 의문이나 비판을 허용하지 않으며 도리어 죄악시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린 아이들의 정신에 끼치는 악영향이야말로 죄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이 온전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불가해한 세상사를 판단하는데 최선의 기준은 인간 이성일 수밖에 없다. 지성(知性) 또한 신이 내린 선물이다. 신앙의 교리나 믿음의 내용은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이해와 납득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맹신의 위험성 못지않게 세속화된 종교 역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에서 종교는 물신을 숭배하기 위한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전락해 버렸다. 현대 종교는 인간에 내재된 근본적 종교심을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세속화된 세계의 욕망 추구와 그에 따른 값싼 위안을 주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그러니 실제 삶이 아니라 형식적 종교 의식에 비중을 두게 된다. 삶과 믿음은 자꾸 유리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신자만 해도 3할이 넘는데 세상은 좀체 나아지지 않는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추종자들에게 조차도 별로 실천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종교의 해악이 아무리 강조되고, 반종교적인 분위기가 아무리 번지더라도 인간의 영성에 대한 추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종교는 더 고차원적인 형태로 승화, 발전되어 갈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좀더 열리고 높아진 의식으로 종교를 받아들이고 긍정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특정 교리에 갇힌 폐쇄적인 종교는 앞으로의 시대에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을 것이다. 닫힌 종교보다는 열린 종교적 감수성의 회복이 우선되어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인격화된 신을 믿지 않으며.... 내 안에 종교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과학이 밝혀낼 수 있는 세계의 구조에 대한 한없는 감탄일 것이다.” 아인슈타인을 전통 입장에서는 신앙인이라고 부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자연 세계에 대한 경이와 경탄의 고백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종교심의 한 표현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은 예술가, 시인, 또는 영성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감수성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그런 바탕에서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종교에 대한 확신이 강한 믿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신적 영적 성장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지금의 나에게는 기성의 종교 틀에 안주하기보다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열린 종교적 감수성이 훨씬 더 가치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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