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달항아리

샌. 2005. 8. 26. 14:15


비 오는 날, 고궁박물관으로 달항아리를 보러 갔다.

지난 15일에 개관한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특별전으로 달항아리 9점을 전시하고 있다.


달항아리는 둥그런 몸체에 아무런 무늬가 없는 대형의 조선 백자 항아리를 일컫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백자 항아리의 희고 깨끗한 살결과 둥글둥글한 생김새가 보름달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달항아리는 17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백 년 정도 되는 기간에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높이가 40cm 이상으로 지름과 높이가 거의 같은 비례를 이루는 큰 항아리로 워낙 크기 때문에 하나의 모양을 짓지 못하고, 위쪽과 아래쪽 부분을 따로 지어 접붙여 만들었다. 그래서 허리께에 이음 부분이 보이면서 조금씩 비뚤어져 있다.

그래서달항아리의 매력은 깔끔한 정형이 아니라 어딘가 이지러진 듯한 자연미에서 나온다. 좌우 비대칭의 둥그스름한 모습이 도리어 자연스럽고 넉넉한 느낌이 들어 보는 이의 마음을 너그럽고 풍성하게 해준다.


달항아리는 감상용이 아닌 실제 사용하던 그릇으로서 경기도 분원에서 구워냈다고 한다.

19세기 무렵에는 반가(班家) 뿐만 아니라 웬만한 가정에서는 한두 개씩 놓고 쓰던 것이었다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사라지고 전 세계를 통틀어 30여 개 정도만 남아있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달항아리는 귀족적이지 않고 서민적이며 선조들의 생활과 애환이 배어있는 예술품이다.

원래 달항아리에는 맛있는 장이나 젓갈을 저장해 왔다는데, 이번에 전시된 달항아리 중에서도 저장했던 장이 배어나와 겉으로 무늬를 만든 것도 있다.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예술가와 문인들이 수없이 칭송해 왔다.

이번 전시장에 적혀 있던 글 중에서 몇 가지를 옮겨 본다.


‘둥글다 해서 다 같지가 않다. 모두가 흰 빛깔이다. 그 흰 빛깔이 모두가 다르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백색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그렇게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

교묘하기만 한 우리 항아리에는 움직임이 있고 속력이 있다.‘


‘이 항아리를 빚어 낸 사람들도 큰 욕심 없이 무심히 빚어내었을 것이고, 이것을 사들여 아침저녁으로 매만지던 조선시대 여인들도 그저 대견스러운 마음으로 무심하게 다루어 왔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남겨진 백자 항아리들이 오늘날 한국미의 가장 특색 있는 아름다움의 한 가닥을 차지하게 되었고, 요사이는 잘 생긴 백자 항아리 하나에 천만금이 간다고 해도 놀랄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한국의 흰 빛깔과 공예 미술에 표현된 둥근 맛은 한국적인 조형미의 특이한 체질의 하나이다.

따라서 한국의 폭넓은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 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서 한국미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조선시대 백자 항아리들에 표현된 원의 어진 맛은 그 흰 바탕색과 아울려 너무나 욕심이 없고 너무나 순정적이어서 마치 인간이 지닌 가식 없는 어진 마음의 본바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백자 항아리들을 수십 개 늘어놓고 바라보면 마치 어느 시골 장터에 모인 어진 아낙네들의 흰옷 입은 군상들이 생각나리 만큼 백자 항아리의 흰색은 우리 민족의 성정과 그들이 즐기는 색채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웃 나라 중국 자기나 일본 자기들이 그렇게 다채로운 빛깔로 온통 사기그릇을 뒤덮던 시애데 우리는 마치 산 배꽃이나 젖빛깔에도 비길 수 있는 순정어린 흰빛의 조화를 유유하게 즐겨왔으니 과연 한국 사람은 백의민족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백자의 미는

이론을 초월한 백의(白衣)의 미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껴서 모르면 말을 마시오

원은 둥글지 않고 면은 고르지 않으나

물레를 돌리다 보니 그리 되었고

바닥이 좀 뒤뚱거리나

뭘 좀 괴어 놓으면 넘어지지야 않을 게 아니오

조선 백자에는 허식이 없고

산수와 같은 자연이 있기에

보고 있으면 백운(白雲)이 날고

듣고 있으면 종달새 우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는

백의의 민(民)의 생활 속에서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고금미유(古今未有)의 한국의 미

여기에 무엇 새삼스러이

이론을 캐고 미를 따지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끼지 않는다면 아예 말을 맙시다‘



너무 찬탄을 들어서인지 막상 실물을 본 느낌은 선입견에 미치지 못 했다.

그러나 어릴 적 자랄 때 우리 집 골방에 있었을 항아리로 생각해도 될 만큼 친근하고 포근한 그런 느낌은 들었다.

그러고 보니 보면 볼수록 자꾸만 정이 들고 애착이 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완벽한 조형미를 자랑하는 고급 예술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엇이었다.

앞의 글에서 나왔던 ‘백의의 민(民)의 생활 속에서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고금미유의 한국의 미’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전시실의 의자에 앉아 멀리서 달항아리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실내에서 부분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는 달항아리가 정말 동쪽 하늘로 떠오르는 달 같았다. 보름달에서 약간 지난 살짝 찌그러져 보이는 모습이 환상적이라 할 만큼 아름다웠다.

아니 호수에 비친 보름달이라고 할까, 호수물이 흔들리며 약간 이지러져 보이는 달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특기할 것은 이 달항아리가 사대부나 특정 계층의 심미안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 일반 백성들의 생활용기로서의 역할을 하던 것이었다는 데 있다.

여기에는 어떤 기교나 허식도 없다. 백자의 형식을 빌린 민중들의 멋과 의식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를 이렇게 감동시키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그저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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