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작고 단순하게

샌. 2005. 1. 4. 14:38

무료할 때는 무엇을 하시나요? 나는 백지 위에 낙서를 합니다. 특히 지리한 회의가 끝도 모르게 길어질 때면 나도 모르게 종이 위에 낙서를 하게 됩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회의에 열중하고 있다고 착각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나는 귀로 몰려드는 소리들을 내쫓으며 하얀 백지의 유혹에 빠져듭니다.

 

그저 무의식중에 떠오르는 말들을 적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종이 위에는 의미 연결이 되지 않는 단어들이 가득 적혀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한 단어만을 계속 적기도 하지요.

 

언제고 제일 많이 적혀있는 단어는 날 비[飛]자입니다. 마지막 획을 길게 내리뻗어 한껏 멋을 부리며 이 글자를 쉼 없이 쓰고 있는 자신을 볼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종이 한 면이 이 한 글자로만 가득 채워져 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내 무의식에는 날고 싶다는 욕망이 잠재해 있는가 봅니다.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 저 높은 세계로 자유로이 날고 싶다는 바람이 이렇게 글자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 글자를 고집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죽 적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꽃, 새, 달, 별, 하늘..... 그런데 묘하게도 한 글자로 된 말들이 유난히 많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름다운 말은 외글자로 되어 있다. 그때는 무슨 새로운 법칙이나 발견한 것처럼 신나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두 글자로 된 아름다운 말도 찾아보면 그만큼 나오겠지요. 그래도 왠지 외글자로 된 말에 애착이 가는 것은 아직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한가한 지금, 그 말들을 다시 한 번 찾아봅니다.


꽃, 꿈, 달, 별, 시, 숲, 풀, 봄, 싹, 밥, 땅, 넋, 비, 눈, 물, 몸, 새, 빛, 숨, 참, 정, 강, 멋, 벗, 길, 집, 들, 잎, 춤, 샘, 씨, 논, 밤, 터, 잠, 불, 돌, 손, 해, 맛, 밭....


더 많은 말들이 나올 것 같은데 여기에서 멈추는 군요. 자세히 살펴보면 생명의 핵심에 해당되는 말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따스합니다. 이런 말들은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함이 좋습니다. 동시에 사람의 생활도 이렇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고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이것이 글자에서 유추해 본 나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사고(思考)든 물질이든 삶의 정수(精髓)와 연결되는 것만을 가지고 단순하고 따스하게 살고 싶습니다.

 

'참살이의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색 마녀의 저주  (0) 2005.02.03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0) 2005.01.12
빈곤 사회  (1) 2004.12.27
줄이면 얻는다(少則得)  (0) 2004.12.22
감자 먹는 사람들  (0) 2004.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