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징기스칸

샌. 2004. 8. 14. 11:48

조선일보가 '징기스칸'이라는 새 잡지를 만드는가 보다.

무슨 잡지를 만들든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 잡지의 창간호 광고를 보니 영 꺼림찍한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다.

굵직한 글씨로 내세운 취지가 '천재에게 감사하는 잡지, 1등의 철학을 나눠 갖는 잡지, 성공한 사람이 큰 소리 치는 잡지'라 되어 있다.

조선일보의 엘리트주의, 1등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문구인데 성공한 사람들이 앞으로 또 얼마나 더 큰 소리를 쳐야그들은 만족하게 되는지 솔직히 겁이 난다.

잡지 이름을 '징기스칸'이라고 정한 것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징기스칸은 인류 역사상 가장 생산성이 높은 지도자였습니다. 13세기 초 몽골 인구는 약 100만 명, 징기스칸은 여기서 약 15만 명의 기마군단을 징집하여 고려에서 지금의 헝가리까지 정복하고 인구 1억 명을 통치했습니다. 그는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세계제국을 건설하고 동서교류와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징기스칸은 유목민 사회에 법치의 시스템을 만들어 살육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징기스칸이 상징하는 세계 제 1의 효율성, 개방과 관용, 그리고 평화와 번영은 우리 잡지의 기조가 될 것입니다.'

징기스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칼로 세계를 자신의 말밥굽 아래 복속시키고 몽골제국을 건설한 정복가요 야심가라는 것이 내 생각인데 가치관에 따라 그를 존경할 영웅으로 평가할 수도 뛰어난 지도자로 평가할 수도 있다. 나폴레옹류를 영웅으로 평가하든 말든 그건 그 사람의 몫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야심이 수 많은 국가와 부족을 파괴하고 피를 부르고 문화를 붕괴시켰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세계 문명의 출발점이 된 긍정적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복과 침략은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다. 징기스칸이 어떤 덕치를 베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서 그 제국이설명한 것과 같이 평화롭고 효율적이고 번영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면 왜 몽골제국은 이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잡지 이름으로 징기스칸을 내세우는 그 도발성이 영 못마땅하다.

조갑제 편집장이라는 분의 주장을 계속 보자.

'최고, 최대, 최초에는 우연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고뇌와 환희가 오고간 천재의 철학이 거기에 숨어있을 것입니다. 저희는 1등의 비밀들을 밝혀내어 나눠줌으로써 모두가 1등이 될 수 있도록 힘 쓸 것입니다. 요사이 한국에서는 1등을 죄악시, 적대시하는 망국적 분위기가 狂風처럼 사회를 휩쓸고 있습니다. 1등과 天才 때문에 먹고사는 凡人이 그 고마움을 모르고 질투심과 열등감을 천재들에게 쏟아붓는 판국입니다. 우리는 1등과 천재들이 존경받고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건전한 사회를 향하여 나아갈 것입니다.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凡人에겐 침을, 바보에겐 존경을, 天才에겐 감사를!' 저희 잡지는 바보처럼 우직하게 일하면서 천재를 알아보는 순수함을 견지하겠습니다. '징기스칸'을 읽으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힘이 불끈 솟아나며 세상이 밝게 보이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징기스칸과 함께 세계로, 최고로 달려갑시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을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몰아부치는 인상을 받는다. 존경과 상찬을 받을 것은 오직 1등과 천재 뿐이라는 듯이 말하고 있다. 심하게 말하면 나머지 인간들은 별 볼 일 없는 불필요한 존재들이라고 보는 듯 하다.

老子의 가르침은 정반대이다. 不尙賢이라고, 소위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을 존경하고 섬기는 풍토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모두가 1등만 되려고 한다면 이 세상은약육강식의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세상은 1명의 천재도 필요하지만 99명의 凡人도 응당 필요하다. 천재는 인류에 끼친 업적에 의해 존경받아 마땅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보통 사람들의 가치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존중되어야 한다. 거기에 우선 순위는 없다.

환경 오염, 전통의 붕괴, 인간성의 상실 등 우리에게 닥친 수 많은 현대 문명의 문제들의 근원은 이런 1등주의와 함께 합리와 능력을 앞세운 경쟁 제일주의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인간이고 자연이고 내 이익을 위해서라면 밟고 파괴하는 정복주의이다.

조 편집장이 말하는 건전한 사회란 결코 1등과 천재들에 대한 존경을 통해서 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도리어 1등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좌절과 시기를 낳을 뿐이다. 서로 1등이 되려는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는 당연히 그 반작용으로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의 한만 남길 뿐이고 다른 사람들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부와 지위는 사람을 결코 행복하게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조 편집장이 어디에서 인용한 글인지 모르지만 도대체 어느 누가가 '凡人에겐 침을, 천재에겐 감사를!'하고 외칠 수 있는가? 참다운 천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의 존경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태평성대일 때는 나라의 지도자가 누군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는 법이다. 마치 천재의 머리에 의한 시은으로 보통 사람들이 먹고 산다는 사고방식으로는 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어줍짢은 엘리트주의가 이 사회를 구원할 수는 없다.

그는 마치 사람들을 징기스칸의 기마병으로 만들려는 것 같다. 몇 사람의 천재를 앞세워 온 세계를 정복해 나가려는 신 제국주의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그 말밥굽 아래 부스러지는 피와 눈물은 상관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좀 못 살아도 좋으니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1등 보다는 자유와 평등이 보편 가치가 되는 세상, 각자의 개성과 능력이 나름대로 꽃 피어나고 사람과 자연이 수단이 되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그 나라에서는 1등과 꼴찌의 구별도, 천재와 바보의 구별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처럼 1등의 비밀을 밝혀내려 애쓸 필요도, 모두가 1등이 되도록 하려는 헛된 노력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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