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3년 전

샌. 2004. 2. 29. 17:44
만약 운명이 있다면 그는 무척 짓궂은 장난꾸러기일 것 같다.

神은 밋밋한 인생을 재미없다고 본 것일까, `그러던 어느 날`하는 식으로 우리 인생길에다 이곳 저곳 지뢰를 묻어 두었다.
춤추며 가던 인생길에서 지뢰를 밟아 피투성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상처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 나기도 한다.
사람이 사는 동안 롤러 코스터를 탄것 마냥 구름 위에까지 올라가기도 하고 또끝없는 아찔한 추락을 경험한다.
인생은 시소타기다.

5년마다 순환 근무를 해야 하는 탓에 이번에 직장을 옮겼다. 그런데 새로 옮긴 직장의 여건이 내가 기대한 조건과는 많이 어긋난다.
여유있는 삶, 느릿 느릿 걸어가고 싶은 삶을 추구하면 할 수록 그에 비례하여 내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는 장난꾸러기의 훼방에 속이 탄다.
세월이 흐른 뒤에는 神의 은밀한 속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래도 답답한 노릇이다.

터를 장만하고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며 한껏 부풀어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온 세상이 내 것이었다.
당시의 어느 날 베트남에서 근무하고 있던 친구에게 보낸 메일이 당시의 내 생각을 대변해 주고 있다.
지금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신세가 되어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내 꿈이 또 다시 활짝 피일 날이올 것이라는 믿음은 갖고 있다.
아마도 지금의 비틀거림은 그 때의 탄탄한 발걸음을 위해 필요한 준비 과정일지 모른다.


`긴 횡설수설이 될지 모르는 메일을 쓰네.
이번 달에는 너댓번 이곳을 왔다갔다 하면서근 20일 가까이 생활했네. 이제 이곳 생활도 틀이 잡혀가는 때문인지 이제 조금은 얘기할 수가 있을 것 같네. 지리하더라도 보아 주게나.이곳 생활과 생각을 떠오르는대로 적어볼까 하네.

새벽 5:30에 일어나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네. 보통 저녁 9시면 잠자리에 들지만 잠이 많은 체질이라 자명종의 도움이 없으면 스스로는 일어나지 못하네.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는데 전혀 그런 징조가 보이지 않으니 잠 복 하나는 타고난 것 같네. 그리고는 걸어서 약 10여분 거리에 있는 수녀원에 가서 매일 미사를 드리네.

새벽 매일 미사는 다닌지가 1년이 좀 넘었는데 빠질 때도 있지만 이젠 생활 습관이 되었네. 서울과 달리 이곳은 소규모이고 또 수도자가 많아서 그런지 분위기가 아주 좋네. 종교적 분위기에 쉽게 젖어들 수 있지.
특이한 것은 주일 미사때나 새벽 미사때나 참여하는 인원수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네. 도시 교회에는 새벽 미사에 나오는 신자 수가 전체에 비하면 소수인 경우가 흔하지.

미사 후에는 뒷 산에 올라가네. 400m 급의 산줄기가 마을 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산길을 따라 십자가의 길이 만들어져 있어 쉬엄 쉬엄 천천히 걸어 올라가네.
기도나 묵상에 전념하는 것은 아니고 이른 아침의 산길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올라가면마을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전망 좋은 곳이 나오네.
어떨 때는 아침 안개가 자욱히 깔려 있기도 하고, 일 나가는 농부들의 모습도 가물히 보이네. 거기서 떠오르는 해를 맞으며 한참을 쉬다가 내려오네.

아침 식사는 쌀가루로 생식을 하고 있네. 생식 습관 역시 1년이 넘는데 원래는 아침과 저녁을 했었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아침만으로 줄였는데, 작년에 간디 자서전을 보다가 감명을 받아 실천해 보게 되었네. 육식을 피하고 채식을 하라는 그분의 권고에 따른 것이지.
서양 속담에도 `You are what you eat`라는 말이 있듯이, 단순한 비교일지 모르지만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의 성질 차이등이 다 일리가 있어 보였네.
고향 이웃 동네에 평생을 쌀가루와 솔잎가루 만으로 살아오신 한 할아버지가 계시네. 아픈 사람에게 침을 놓아주시는 일을 하시는데 그 정정한 기력과 건강이 불가사의라네. 그러나 나는 아직 완전한 실천은 하지 못하고 있네. 채식 생활은 나의 꿈이기도 하네.

그리고는 볕이 뜨거워지기 전에 밭일을 좀 하네. 밭일이래야 잡초 뽑기가 고작인데, 거름도 약도 주지 않고 돌보지도 않아서 작물들은 대개 이웃 밭보다 반밖에 성장하지 못했네.
고추는 탄저병에 걸려 거의 전멸 상태이고, 다른 것도 초보 운전의 미숙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네.
그래도 우리 집에서 먹을 것은 충분히 마련되고 있고, 이웃 집들과도 나누어 먹고 있네. 특히 옥수수가 가장 재미있었고 지금은 호박이나 깻잎, 가지, 열무등을 잘 먹고 있네.

그러나 지내다 보니 작물 기르기나 집 가꾸기 같은 것에 나 자신 별 관심이 없는 것을 발견했네. 어떤 사람들은 주위에 화초도 기르고 이쁘게 꾸미라고 하지만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네.
손이 적게 갈 작은 공간에 이 한 몸 편히 쉴 수 있다면 족하다는 그런 생각이네.

그 뒤에는 책을 보며 빈둥거리는 한가한 시간이네. 아직 컨테이너가 뜨거워지기 전이라 안에서 지내기에도 쾌적하다네.
이번에는 `날씨가 너무 좋아요`와 `벼랑 위에서 걷다`라는 두 권의 산문집을 읽었네.

그리고 점심 식사를 하는데 밑반찬은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밥만 지으면 되네. 끓일 수 있는 것은 고작 김치국인데, 앞으로는 간단한 요리쯤은 배워야겠다는 필요를 느끼고 있네.
가끔씩은 수녀원이나 이웃 집의 초대를 받아 얻어 먹기도 하네.
이곳 주민들의 순박함과 친절은 예상 밖이네. 요사이 시골 사람들의 야박함과 영악스러움에 대하여 많은 경고를 들었는데 지금까지는 전부가 기우였네.
지금은 교통편도 좋아지고 외지인들도 많이 들어와 살게되어 그런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들의 심성만은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네.

그러나 이곳이 나에게 가장 의미있는 이유는 여러 번 얘기했던대로 종교적 분위기 때문이네.
수녀님들과의 사귐과 새벽 미사가 가능한 것이네. 수녀님들로부터 받는 종교적 영향은 지대하네. 그리고 이런 촌구석에서 매일 미사가 가능한 곳은 그리 흔치 않을걸세. 이것이 회두(回頭)를 하고 나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 지역을 선택한 이유이네. 교통이 편리하지도 않고, 경치가 뛰어나지도 않지만 나에게는 최고의 장소라네.

오후에는 컨테이너 안에서 지내기가 힘들어 외부 볼 일을 보거나 주위를 산책하기도 하네. 때로는 이웃집에 들러보기도 하는데 노인분들이라 말동무가 되어 주면 매우 좋아하시네. 마을 얘기나 인생 얘기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네.
만약에 내년에 직장을 옮기게 된다면 집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네. 머릿 속으로는 온갖 종류의 집들이 온갖 크기로 세워졌다 허물어졌다 하고 있네. 누구의 말로는 그렇게 1년 이상 뜸이 들어야 집 한 채가 나온다는데 아직 확정된 것은 무엇 하나 없네. 다만 `작고 단순하게`로 원칙은 정했네.

이곳에 들어오면 세상과는 완전히 절연되어 버리네. TV도, 신문도, 컴퓨터도 없고 다만 아내의 휴대폰을 빌려 오는데 그러나 집 외에는 전화가 올 데도 전화를 걸 데도 없네.
이상한 것은 이곳에서는 그런 세상과의 매개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네. 심지어 하루 종일 지내면서도 가족조차 생각 한 번 나지 않을 때도 있네.
사람 사이에서 보다 혼자 있을 때, 대화보다는 침묵 속에서 더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느끼는 내 천성을 여기서 다시 확인하고 있네.

한가한 오후 시간이면 밭으로 날아오는 새들을 종종 보게 되네. 종류는 많지 않은 것 같은데 딱새와 멧비둘기가 가장 많이 눈에 띄네. 이상하게도 그 흔한참새는 이때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네.
산 너머에 백로 서식지가 있어서인지 백로나 왜가리, 해오라기도 자주 볼 수 있네. 어느 때는 내 곁으로 후투티가 갑자기 날아와 놀란 적도 있네. 후투티가 그렇게 큰 새인줄은 새롭게 알았네. 밤이면 먼 곳에서 소쩍새 우는 소리도 자주 들리네.

이곳은 식물 생태적으로도 무척 관심이 가는 지역이네. 마치 외부와 교류가 잘 안되는 섬같은 인상을 여러번 받았네.
민들레에 두 종류가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우리가 보통 보는 민들레는 거개가 서양 민들레네. 번식력과 적응력이 강해 어디서고 잘 자라나지.
또 하나 우리 토종 민들레가 있는데 서양 민들레에 쫒겨 거의 사라지고 이젠 보기가 힘들어졌네. 서양 민들레보다 더 연한 노란색인데 직접 본다면 그 품위가 서양 민들레에 비할 바가 아니네.
그런데 그 반가운 우리 민들레가 이곳에서는 지천이네. 서양 민들레는 한 포기도 보지 못했네. 내 짧은 지식으로 이런 지역은 참으로 희귀한 곳이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계곡이 있네. 이웃 분들의 안내를 받아 들어가 봤는데 구천동계곡이 연상되었네. 규모면에서야 그곳과 비할 수는 없지만 한여름 대낮인데도 서늘한 기운이 가득했네.
특히 사람의 발길이 아직은 드물어 다행이었네. 그래도 휴일이면 외지인들이 찾아와 놀다가 버린 쓰레기로, 봄이면 산나물이 많다고 소문나 사람들이 몰려들어 나물과 약초들이 뿌리채 뽑혀 버린다고 걱정을 하더군.
어느 환경 모임에선가 강사가 말하기를 지구의 환경 오염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간단하고 유일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없어지는 것이라는 얘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네.

밖에서 이 마을로 들어오자면 작은 산을 하나 넘어야 되네.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꼬부랑 오솔길이어서 넘을 때마다 기분 좋은 길이었네.
그런데 올 초부터 중장비가 들어오더니 산을 박살내 버리는게 아닌가. 길을 넓히고 곧게 만든다면서 산허리를 잘라내고 끊어버리는 것이 무자비한 폭력에 다름 아니었네. 고작 몇 분 더 빨리 편하게 다니자고....
자연이 말이 없다고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왜 우리는 자연과 공존하는 지혜를 잃어버린 것일까?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 못질하는 것에 다름 아님을 왜 모르는 것일까?

너무 화나는 일이었네. 이런 폭력이 전국적으로 행해지고 있네. 우리 고향을 지나가는 중앙 고속도로가 곧 개통되는데 수년간 공사 현장 옆을 지나다니면서 소백산과 치악산의 신음 소리에 무척 괴로웠네. 가는데 몇 시간 더 걸리더라도 이런 수혜는 받고 싶지 않네.

가장 즐거운 때는 저녁 시간이네. 일찍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 누우면 창문을 통해 잿빛으로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볼 수 있네. 재수가 좋으면 수채화 색깔의 노을을 한껏 감상할 때도 있지.
기온이 떨어지는 공기는 상쾌하고 나는 너무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네. 밤이 되면 창문으로 달과 별이 보이는 작은 방, 별을 보며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만 하네.
때로는 이 방이 작은 우주선으로 상상되기도 하네. 별들의 세계를 자유롭게 날아 다니는 우주선의 꿈!

또 컨테이너가 좋을 때는 비가 올 때이네.
볼 품 없는 컨테이너지만 이 때만은 다른 어느 집에도 부럽지가 않네. 지붕과 사방 벽이 악기로 변하고, 나는 악기 속에 들어있는 작은 아이가 된다네.

가끔씩 개 짖는 소리가 밤의 고요를 깨뜨리기도 하지만 이젠 개소리에도 많이 너그러워졌네. 어떤 날은 너무 조용해서 창문을 열고 바라보면 이놈들이 컹컹대며 나 여기 있소 하네. 이놈들이 외부 자극에 좀 둔감해 졌으면 좋으련만....

밤에는 될수록 촛불 만으로 지낼려고 하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념과 망상 사이에 가끔씩 무념의순간을 찾아 보지만....

땅을 500평이나 끼고 앉았으니 부자중에 부자지만 생활자체는 여러 가지로 불편한게 많네.
이제 물이 들어 왔지만 호스를 이리저리 돌려야 되고, 똥은 참고 참다가 아껴서 이웃집 신세를 지고, 오줌은 요강을 쓰고 있으니 아마도 달동네 빈민들의 생활과 비슷할지 모르겠네. 그래도 가끔씩이니 재미가 있네. 마치 옛날의 꽁보리밥이 가끔씩 그리워지는 것처럼....

가만히 누워 있다가 보면 어떨 때는 오십이 다 되어가는 나이때문에 섬뜻 놀랄 때가 있네.
젊은 시절에 상상하던 장년의 원숙함과 인생의 경륜은 어디에 있는가? 마치 손바닥으로 잡은 물이 솔솔 빠져 나가듯 육체적, 정신적인 생의 기운이 점점 쇠하여 가는 것을 지켜 보네. 이러다가 얼마 후면 스스로의 머리 감는 일조차 힘들고 귀찮아질 날이 이내 올 것 같네.

아름다운 삶!
그것은 늘 무지개이고 파랑새일까? 저 너머 있는 것 같은데 가까이 가 보면 또 저만큼 달아나 있는 것.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울지도 모르네. 잡아버린 무지개나 파랑새는 더 이상 신비도 아름다움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네.

우리는 神의 정원에서 철 모르고 뛰어노는 어린 아이일지도 모르네.
백화가 만발한 꽃밭에서 뛰놀고 있으면서도 투정과 트집으로 부모 속을 썩히고 있는 철 모르는 아이.
너무 긴 넋두리를 늘어 놓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 이해해 주게나.

친구의 행복을 빌면서.....`
(2001. 8.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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