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무릉도원은 어디에

샌. 2004. 2. 9. 16:11
`소백산의 어느 계곡에서 봄꽃을 구경하다가 길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안개까지 끼기 시작해 동서남북의 방향도 헷갈리면서 헤매게 되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향기가 진동하는 곳에 절벽이 나타났고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작은 동굴이있었다. 그 동굴을 지나가니 시야가 훤하게 트였다.

산으로 둘러싸인 들판에는 집들이 늘어서 있었고 기름진 논밭이며 아름다운 호수, 뽕나무나 대나무 숲이 눈에 들어왔다.
개와 닭소리도 한가로이 들리고 사람들은 들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평화롭고 이국적이었다. 장식은 없었지만 깨끗하고 소박한 흰 옷을 입은사람들은 한결같이 즐겁고 만족스런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더니 크게 놀라 어디서 왔느냐며 물었다.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했더니 집으로 초대해 술을 내고 닭을 잡아 대접해 주었다. 낯선 이가 찾아왔다는 소문이 돌아 모두들 찾아와 이것저것 물었다.
자기들은 옛적 선조들이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왔는데 그 뒤로 외부와는 격리되었다고 했다. 그 기간이 200년도 더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이 어느 시대냐고 물었다. 그들은 일제시대도 6.25전쟁도 몰랐다. 바깥 세상의 동정을 말해주자 모두들 탄식하고 놀라와했다.
그들은 돌아가며 집으로 초대해 술과 음식을 대접해 주었다.

그렇게 며칠을 머문 후 돌아오게 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절대로 바깥 세상에는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동굴을 나와 걸으면서 곳곳에 표시를 해 두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찾아갔을 때 이미 표시도 없어지고 그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패러디해 보았다.
동양인의 심성 안에는 이런 이상향을그리는 마음이 잠재되어 있다고 본다.
세상과의 교류를 끊고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살아보고 싶은 잠재의식이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있었고, 그것은 난세일 수록 더욱 두드러졌다.
출세(出世)와 피세(避世)는 그렇게 늘 줄다리기를 해 왔다.

서양의 심리학자 마슬로도 인간의 기본 욕구를 `5F 이론`으로 정리한 바 있다.
식욕(Feeding), 성욕(Fucking), 집단욕(Flocking), 정복욕(Fighting), 도피욕(Fleeing)이 그것이다. 잘 드러나지 않는 도피 심리를 기본 욕망으로 정의한 것이 특이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도피 욕구의 충족은 무척 만만찮다.
식욕이나 성욕은 단순한 면이 있지만 도피욕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특정 장소가 사람을 만족시켜 주지는 않는다.

장소로서의 무릉도원(武陵桃源)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보통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또는 산림 속에 들어가 살고 싶다지만 장소의 이동이 결코 만족을 주지는 않는다. 도리어 기대가 크면 클수록 실망도 크게 될 것이다. 내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어디든 도피욕을 충족시킬 장소는 없다.
즉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사실 내 있는 자리가 바로 무릉도원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처음 터를 발견하고 바로 이곳이야말로 찾던 이상향이라고 흥분했고 기대도 컸다.
그러나 그것이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내 욕심 때문이었으며 일면에서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환상 때문이기도 했다.
솔직히 지금의 농촌은 이미 옛날에 경험했던 고향이 아니다. 이웃사촌과 두레로 대표되던 농촌 공동체는 자본의 물결 앞에서 소멸되었다. 농촌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중요한 것은 결국 내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수십 년간 경쟁과 소비 문화에 젖어 살아왔던 내 삶의 관성이 나를 가만 두지 않고 있다. 무엇에든 경제적 척도와나 중심의 사고를 내세우게 되니 산 속에 들어간들 마음은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

묻노니 속세의 때에 절은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먼지와 소음이 없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가?
원하건대 가벼운 바람을 받으며 높이 날아 올라, 그런 이상의 세계로 나아가시길....

욕심을 버리고 나 자신을 비우기!
그래서 무릉도원은 내 마음 안에서 찾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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