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내려오는 계단을 올라가며

샌. 2004. 1. 15. 13:37
30년 전이다. 동두천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 휴일 외출을 나갔다가 서점에 들렀다.
서가를 훑어보던 중 특이한 책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색 표지로 되어 있었는데 미국의 한 교사의 교단 일기였다. 자세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비판적 시각에서 미국의 교육 현실을 고발한 내용이 아니었는가 싶다.
그 책 제목이 `내려오는 계단을 올라가며`였다.

책을 사 가지고 귀대하는 버스 안에서 앞으로의 내 삶이 이 책 제목과 같이 전개될 것 같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런 묘한 느낌이 들었다.
세상의 주류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살 것 같은, 그래서 약간은 삐딱한 모습으로 서 있을 것 같은 그런 예감이었다.

지금은 가끔씩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동료들과 대화하면서 의견 충돌을 빚을 때, 세상 현실에 대한 해석이 서로 엇박자로 어긋날 때, 그래서 일반 사람들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것을 느낄 때면 30년 전의 그 날이 떠오르면서 그 때의 예견이 맞았구나 하고 실소를 하게 된다.
지금의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그런 씨앗으로 잉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살아온 과정이나 생각들, 또현재 삶의 형태는 내 속에 들어있던 불가해한 어떤 원인에 의하여 진행되어 온 결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무엇인가를 선택한다고 하지만 그 선택마저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조종당하는 것이리라.
그것을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이미 내 속에 들어있는 삶의 결정 인자가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발현되는 것이 내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아무리 날고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생래적이고 숙명적인 한계를 요사이는 많이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나에 대한 긍정이 될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처한 입장이나 환경은 철저히 나의 것이라는 관점으로 유도되기 때문이다. 다른 것으로 핑계를 댈 명분이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내 현실과 30년 전의 그 때의 느낌 사이의 질긴 연관성이 묘하게도 자꾸만 상기된다.
그래서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어떤 운명의 북소리가 우리들 속에서 울리고 있는 것만 같다.
이렇게 해서 거역할 수 없는 내 내부의 복잡하고 반현실적인 경향을 이해할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모두들 내려오는 길을 기어코 올라가려는 고집을, 갈등과 고뇌의 숲 속으로 일부러 찾아들어가려는 이유를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

내가 살아온 길은 늘상 현실과 삐걱거리는 마찰음이 그칠 날이 없었다.
현실과 삐딱하게 비켜서서 융화하지 못하고,타협할 줄 모르는 전형적인 현실 부적응자의 모습이다.
또한 그 속에는 엉큼한 지적 오만이 숨어 있기도 하다. 지적 오만은 자기 비하와 동전의 양면이다. 따라서 거기에 수반되는내적 갈등은 피할 수가 없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넌 언제 철이 들거냐?"하는 눈빛으로 근심스럽게쳐다본다.
정말 얼마만큼 더 나이가 먹어야 철이 들지는 까마득하기만 하다.
그러나 철이 드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이 세상에 길들여지는 것이라면 그런 철듦은 앞으로도 사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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