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청빈(淸貧)

샌. 2004. 2. 22. 15:00
내가 존경하는 사람중에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이 있다.
그는 스스로를 평화주의자, 사회주의자, 채식주의자라고 불렀는데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 따라 아름다운 일생을 산 용기있는 사람이다.
어찌보면 미국 사회의 아웃사이더라고 할 수 있는데 현대 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몸으로 실천하며 보여준 분이다.

니어링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 제국주의라는 정치 체제를 혐오했는데 이것에 대한 저항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이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따라 일관되게 행동한 분이다. 그것은 결국 부의 포기와 단순 소박한 생활로 나타나게 된다.

그 분이 부를 보는 관점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부는 타락했다는 것이다.
부 자체가 주는 안락이 인간을 타락하게 하는 요인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불평등이 결국은 인간을 윤리적으로 타락시킬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 같다.
그것은 톨스토이가 빈민가의 인구 조사를 하다가 빈민 실태를 접하게 되고 그래서 빈부 격차의 문제, 나아가 사회 구조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 배경과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결국 안정이나 안락, 편리, 욕구 충족을 따라 사는 삶은 기존 사회 체제의 유지라는 미끼를 무는 것이며 올바르지 못한 이 사회의 현상 유지에 도움이 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부라는 것이 인간다움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한 인간의 창조적인 삶과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이행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물질을 쫓다가 안이하고 부패한 삶 속으로 침몰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래서 그는 부를 추구하지 않고 돈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서 올바른 삶을 사는 길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겪은 숱한 인생 경험 중에서 부의 유혹을 거절한 것만큼 현명한 처사는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불로소득을 철저히 배격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1>
1920년대에 뉴욕의 재력가 한 사람이 유산 십만 달러를 자신에게 남기겠다고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끝까지 고사하며 받지 않았다.

<2>
1차대전 직후 독일의 채권을 산 적이 있었는데 전후 복구 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그 값어치가 100배로 뛰어 올라 6만 달러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 고민하다가 독일 국민의 노동에 대한 착취로 얻어진 비정상적인 이득이라는 결론을 내리고채권을 전부 난로 속에 던져 버렸다.

<3>
살던 버몬트주를 떠날 때 땅값을 당시 시세의 절반만 받고 팔았다. 그리고 그 뒤에 개발붐이 일면서 부동산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올랐는데 아슬아슬하게도 부의 덫으로부터벗어날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태도에 대해 반대 의견을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도 친구들의 문제 제기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사연이 어떠하든 돈에 대해서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흉내낼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돈푼 때문에 형제간에 의도, 목숨도 왔다 갔다하는 지금 세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나 자신도 터를 결정하면서 그런 길을 가겠다고 결심을 했고 그런 비슷한 상황도 겪었지만 아무리 해도 니어링과 같은 초연함이나 용기에는 이르질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도리어 물욕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 애쓸 수록 더욱 발목을 잡히는 경험을 늘상 하고 있다.

식욕이나 성욕은 단순한 생존 욕구로서 먹는 것이나 섹스로 바램이 충족되면 그 욕구는 사라진다.
비해서 물욕은 끊임없이 팽창하는 암세포처럼 끈질긴 면이 있다. 온 세상을 다 집어 삼킨다해도 만족을 모른다. 그 내부에는 근본적으로 폭력성과 이기적 특징이 자리잡고 있다.

청빈(淸貧)이란 궁핍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청빈은 물질적 상태이기 보다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부를 추구하는 마음의 포기이다.
청빈한 생활이란 가난하고 쪼들리는 생활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마음, 그래서 가장 부요한 마음을 가리킨다.
가난한 청빈도 있을 수 있고,돈 많은 청빈도 있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정말 청빈한 이가 재물을 쌓아두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 된다면 청빈은 곧 안빈(安貧)으로 이어질 것이다. 청빈은 안빈이다. 가난해서 오히려 편안한 경지이다.
어느 책 제목대로 너무 가난해서 너무 행복하다는 환희의 소리가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

이런 청빈의 삶을 지향하고 행동으로 옮겨보려 한지 어느덧 5년이 넘고 있다.
내 소유의 집을 가지고 있는 것 조차 부끄러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속에 숨어있는 욕망의 뿌리가 너무나 깊고 단단하게 박혀 있음을 보고 무서움을 느낀다.
애써 부정하려 하지만 내가 따른 이상이 또 다른 욕망 추구의 행동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다.

내 속에 들어있는 마음을 나는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한 때는 나를 변화시키고 그리고 온 세상도 바꿀 수 있을 듯 기백이 넘쳤지만 지금은 나를 잡아줄 또 다른 큰 마음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그 밝고도 맑은 존재가 그립다.
나는 그 분을 따라 이젠 덜 방황하면서 걸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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