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塞翁의 지혜

샌. 2003. 10. 13. 11:19
< 북방의 국경 근방에 점을 잘 치는 늙은이(塞翁)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그가 기르는 말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도망쳐 오랑캐들이 사는곳으로 가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위로하고 동정하자 늙은이는 "이것이 또 무슨 복이 될는지 알겠소" 하고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다.
몇달 후 뜻밖에도 도망갔던 말이 오랑캐의 좋은 말을 한 필 끌고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축하하였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그것이 또 무슨 화가 될는지 알겠소" 하고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 좋은 말이 생기자 전부터 말타기를 좋아하던 늙은이의 아들이 그 말을 타고 달리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아들이절름발이가 된 데 대하여 위로하자 늙은이는 "그것이 혹시 복이 될는지 누가 알겠소" 하고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런 지 1년이 지난 후 오랑캐들이 대거 쳐들어왔다. 마을 장정들이 활을 들고 싸움터에 나가 모두 전사하였는데 늙은이의 아들만은 다리가 절름발이어서 부자가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세상에서 복이 화가 되고 화가 복이 되는 것은 그 변화가 너무 깊어 측량 할 수가 없다.(故福之爲禍 禍之爲福化不可極 深不可測也)>

塞翁은 국경 지대에 사는 노인이라고 할 수도 있고, 꽉 막힌 답답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마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바보같은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뒤에 가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을지 모른다.

지금 이 고사를 다시 보니 차라리 塞翁같은 사람이 그립다.
그는 점을 치는 사람으로서 인간사의 천변만화를 경험하거나 읽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과 실생활로 실천되고 있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것이 지식과 지혜의 다른 점이다. 지식이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라면 지혜란 앎이 인간의 몸 세포 구석 구석까지 스며들어 몸으로 구현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사람을 지혜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런 면에서 塞翁은 지혜있는 사람이 아닐까?
마을 사람들의 일희일비하는 모습과 달리 그는 바위처럼 묵직하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줄 안다. 그런 태도는 그만한내공이 있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다.
아마도 그는 복과 화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보지 않았을 것이다. 복은 화를 부르고. 화는 복을 부르는 것이라면 복과 화둘 모두 우리 삶의 필수 요소인 것이다. 인생의 옷감은 복과 화의 씨줄과 날줄로 짜여지는 것으로 인간의 호오의 감정만 다를 뿐, 복은 화이고 화가 곧 복에 다름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복을 구하고 화를 기피한다. 그러나 복 속에 화가 숨어 있고, 화 가운데 복이 들어 있음을 깨달은 이라면 굳이 그것을 반기고 싫어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이 順命의 인생관이고 順應自然함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한계를 아는 하늘에 대한 겸손함의 인생 태도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아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신비일 뿐이다.복과 화의 변화 조차 너무나 심오해 우리는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塞翁의 인생 태도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인생관으로 현대를 산다면 그는 분명 사회의 낙오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문명의 위기나 생태계의 위기가 잘난 인간이 자신의 힘이 무소불위한 줄 믿고 까불어 댄 결과임을 인식한다면 塞翁에게서 배울 점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많은 것을 얻고 있지만 인간의 내적 상황은더 불안해질 뿐 절대로 행복하지는 않다. 자연과 타인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오직 쉼없는 경쟁을 강요하는 현실에서 인간은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하면서 무언가에 내몰리고 있다.
이런세상의 흐름에서 뛰어 내리는 것이 참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塞翁처럼 인생에서 한 걸음 떨어져 느긋하게 삶을 관조하면서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세상의 현장 가운데에 있다. 그러면서도 세상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利가 있다면 똥덩이에 파리가 모여들 듯 이전투구의 싸움박질 장에서도 벗어나고 싶다. 그렇게 얻은 利가 나에게 어떤 덕을 가져다 주겠는가?
또 별 이유도 없이 利가 내 곁을 떠나더라도 그저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갖고 싶다.
똑똑한 사람이 되고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세상의 충동질로 부터도 자유롭고 싶다.
그저 내 식대로 살고 싶다. 세상에서는 바보라고 칭할지라도 세상이 주지 못하는 내적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싶다.

사실 이런 것마저 욕심일지 모른다.
가을비가 그치고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분다.
세상사란 것이 저 가을 바람처럼 속절없는 것임을 어렴풋이나마 느낀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저 속절없는 것들에 마치 목숨을 건 듯 일희일비하며 부대끼며 산다.
가야 할 길은 멀고도 어둡다.
부디 塞翁의 백 분의 일이나마 닮아 천변만화하는 세상의 변화에서 조금은 중심을 잡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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