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가을 불청객, 우울증

샌. 2003. 10. 11. 13:29

몇 해 전부터던가, 가을만 되면 우울증이 찾아왔다.
이 손님은 도둑 고양이처럼 살금 살금 스며 들어와서는 아차 하고 알아챌 때에는 벌써 나는 포로가 되어 버렸다.
가을의 정점이 되면 내 가슴은 갈갈이 찢어져 찬 바람이 제 멋대로 불어 지나가고 내 마음은 모랫바람 날리는 사막이 된다.
무기력과 절망 - 이런 증상에 한참을 시달려야 한다.
내가 개인주의적 성향이어선지 이 시기가 되면 더욱 자폐적이 되어 버린다. 자신이 만든 고치 속으로 숨어 버린다. 사람들 만나는 것도 싫고, 세상도 싫고 그렇다고 자신을 긍정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작은 성 안에서 웅크리고 있다.
그 성은 따스하지도 않다. 역시 찬 바람 불기는 마찬가지다. 이 때는 안과 밖으로 호되게 시련을 당하는 시기이다.
온 세상의 고통을 혼자 짊어진 듯이 삶이 무겁다. 삶이 스산하고 슬프다.
특히 절망감은 가장 견디기 어렵다.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이 느껴질 때, 인생의 공허함이 밑바닥까지 느껴질 때 그 아득한 절망감은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다.
그리고 나의 존재에 대한 초라한 느낌은 사는데 필요한 자심감까지 뺏아가 버린다. 무기력한 몸과 마음은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지장을 줄 정도이다. 아마 세심한 관찰자라면 나의 이런 변화를 충분히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본다. 고작 어디 아프냐는 반응이 그나마 나은 편이다.
처음에는 약하게 찾아온 이런 감정들을 반기면서 즐겼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 낭만적인 면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을의 마음이란 의례 모든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가을[秋]과 마음[心]을 합하면 쓸쓸할 수[愁]가 되지 않는가.
사실 긍정적인 측면이 있기도 하다. 그것은 인생을 좀더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촐랑 촐랑대는 가벼움 보다는 어두운 색깔이기는 하지만 이런 묵직함이 도리어 인생에 무게를 준다.
그것은 지리하게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반성이며, 삶의 숨겨진 단면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계기도 된다.
그러나 역시 지나치면 병이던가, 나같은 경우는 어쩔 수 없이 한 쪽 방향으로 계속 흘러가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가을이 깊어질 수록 이런 감정은 점점 심화되고 나중에는 통제하기 힘든 우울증으로 연결되는 것 같다.
특히 금년은 어려운 외적 환경과 겹쳐서 더욱 고통스럽다.
빨리 떨쳐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지금은 그저 가만히 엎드려 있을 뿐이다. 놀이나 여행 그 어떤 것도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런 열병도 12월이 되고북풍이 불면 봄 눈 녹듯 사라져 버린다.
올 때도 말없이 찾아 오더니 갈 때도 언제 그랬냐는 듯 어느 순간 달라져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인생 갱년기에 누구나 겪게 되는 과정인지, 아니면 나만 독특하게 경험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이 가을은 나를 무척 괴롭게 만들고 있다.
창 밖으로는 가을 햇살이 화사하다.
뭐가 뭔지 모를 나라는 존재, 지금 여기 시공간의 한 좌표에서 작은 존재 하나가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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