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마더 데레사 어록

샌. 2003. 10. 14. 09:21

貧者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오는 19일에 시복된다고 한다.
종교의 경계를 넘어선 그분의 사랑 앞에서는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바오로딸 홈페이지에서 그분의 말씀 몇 가지를 옮겨 보았다.

그런데 그분과 관계된 일화 중에서 감명깊게 들었던 것은 임종하는 사람들의 종교를 최대한 존중해 주며 각자가 원하는대로 종교 의식을 치러 주었다는 것이다.
임종 순간에 힌두신을 부르든, 하나님을 부르든, 알라를 부르든 개인이 믿어왔던 신앙의 절대자에게 평화롭게 안길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어쩌면 가장 보수적일 수도 있는 가톨릭의 수녀님이 이런 열린 마음일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아래 글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분은 가장 가톨릭적인 분이시기에 더욱 그러하다.

주변에서 장례 의식 문제로 마찰이 생기는 경우를 자주 본다.
상주분들의 종교가 다를 경우 서로가 자신이 믿는 종교 의식으로 고인을 모실려고 한다. 물론 그 심정이야 헤아릴 수 있지만 과연 그것이 형제나 친지간에 마음을 상하면서까지 고집을 부려야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당신의 등잔을 계속 타오르게 하십시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치지 않고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어떻게 등잔이 탑니까?
그것은 끊임없이 심지를 태우는 몇 방울의 기름 때문입니다.
우리 삶 속의 등잔에서 이 기름방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상 속의 작은 것들 곧 성실함, 친절한 말 한마디,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침묵을 지키고 바라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입니다.
당신을 떠난 먼 곳에서 예수님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당신 밖에 계시지 않고 당신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등잔을 계속 타오르게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할 수 있는 일

어느 날 나는 하수구에서 한 남자를 꺼냈습니다. 그의 몸에서는 벌레가 우글거렸습니다. 내가 그를 집으로 데리고 왔을 때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나는 거리에서 동물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사랑받고 관심 속에서 천사처럼 죽어가는군요.” 하고 말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그를 깨끗이 씻기는 데 세 시간이 걸렸습니다. 마침내 그는 수녀님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수녀님, 나는 이제 주님 계시는 집으로 갑니다.”
그러고는 죽었습니다. 나는 한 인간의 얼굴에서 그토록 빛나는 미소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주님의 집으로 갔습니다.
사랑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십시오!

그들도 배가 고프거든요!

당신에게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한 남자가 우리집에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여덟 명이나 되는 한 가정이 있는데 그들은 며칠째 굶고 있습니다.”
나는 음식을 조금 들고 나갔습니다. 내가 그 가정을 방문했을 때, 나는 거기서 어린아이들이 배고픔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얼굴에는 슬픔이나 서러움이 아니라 단지 배고픔으로 깊은 고통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아이들 어머니에게 쌀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쌀을 반으로 나누어 들고 나갔습니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나는 “어디 다녀오셨어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녀는 단순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웃에 다녀왔어요. 그들도 배가 고프거든요!”
나는 그녀가 이웃에 나누어 준 것에 대해서는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너그러우니까요. 다만 그녀가 이웃이 배고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고통받을 때는 자신의 고통에 너무나 몰입되어 있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녀의 행복

어느날 나는 거리에서 한 어린 소녀를 어린이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소녀에게 깨끗한 옷을 주고, 할 수 있는 한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자 그 어린 소녀는 도망을 갔습니다. 나는 소녀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에 그 소녀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아이를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한 수녀님에게 말했습니다. “수녀님, 이 아이가 가는 데마다 따라가세요.”
소녀는 또다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자 한 수녀님이 어디로 갔는지, 왜 도망을 갔는지 알아내기 위해 뒤쫓아갔습니다. 수녀님이 어린 소녀를 따라가 나무 아래 누워 있는 소녀의 어머니를 발견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곳에 두 개의 돌을 괴고 밥을 끓여 먹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수녀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가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 그 어린 소녀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기쁨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이 아이를 사랑했고 이렇게 노천에서 아이를 위해 무언가 특별한 음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어린 소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왜 우리랑 같이 있으려 하지 않니? 우리 집에 가면 더 좋은 것이 많이 있는데?”
소녀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엄마 없이는 살 수 없어요. 엄마는 저를 사랑하시거든요.” 집도 없이 노천에서 어머니가 만들어 주는 형편없는 음식이 우리가 제공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이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 나는 그 아이의 얼굴에서 그런 웃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와 함께 있는 소녀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웃고 있었습니다.
왜냐고요? 그들은 가족이기 때문이지요.
사랑은 처음부터 가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가정에서부터 서로를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의 어린이들을 강하게 만들어서 미래의 다른 이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예수님의 입맞춤

우리 삶 속에서 고통은 결코 완전히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통은 당신이 사용만 잘하면, 특히 당신이 그 고통을 세상의 평화를 위해 봉헌했을 때는 크나큰 사랑의 수단이 됩니다. 고통 그 자체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나누어진 고통은 굉장한 선물이 되며 그것은 사랑의 표징이 됩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사랑의 가장 큰 선물인 은총으로 알려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을 통해 우리의 죄가 사해졌기 때문입니다.
고통·아픔·슬픔·모멸·외로움 등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입맞춤에 불과합니다. 그분이 당신에게 입맞출 수 있도록 당신이 그렇게 가까이 다가갔다는 표시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은 항상 부활의 기쁨으로 끝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꼈을 때는 이제 다가올 부활을 기억하십시오. 어떤 것도 당신을 슬픔으로 채우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기쁨을 잊어버릴 만큼 큰 슬픔이 당신의 마음을 결코 채우지 않게 하십시오.

관상이란...

관상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이해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의 삶을 사랑하는 것, 그분의 삶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관상입니다. 그것을 볼 수 있으려면 질투심·노여움·말다툼이 없는 자비심에 찬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에게 있어 관상이란 어두운 곳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고 우리와 함께 존재하시며 우리를 통하여 거룩해지시도록, 우리 안에 그분의 정열과 사랑과 겸손이 살아 있도록 허용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상은 곧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입김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풍성함을 불어넣어 주시고, 우리를 그분 사랑의 전령사로서 모든 창조물에게 보내시려는 성령께 우리의 영이 소유당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관상으로 채워지는 것은 단순히 하느님의 끊임없는 현존을 깨닫고 삶의 가장 사소한 일 속에도 그분의 부드러운 사랑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오시든 간에 끊임없이 그분께 내어드리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 손에 쥐어진 작은 연필

우리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때 어떤 도구를 쓰시는가에 마음을 쓸 것이 아니라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는 단지 그분 손에 쥐어진 작은 연필에 불과합니다.
내일이라도 나보다 더 쓸모없고 가능성 없는 사람을 발견하시면 그분은 그 사람을 통해 더 큰일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아버지, 저는 거룩해지고 싶고, 착해지고 싶고,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성스럽게 된다는 것은 몇몇 소수를 위한 사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몇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기를 배우게 된다면 거룩해짐도 배우게 되므로 그것은 단순한 의무일 뿐입니다.
거룩해지는 첫 단계는 그것을 염원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부가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는 데 있습니다.
‘나는거룩해지고 싶다.’라는 말은 하느님 것이 아닌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벗어 던지겠다는 뜻입니다. 물질적인 것을 모두 다 버리고 나의 마음을 완전히 비운다는 뜻입니다. 나의 의지와 기호와 기분과 변덕조차 포기하는 것을 뜻합니다.

가난의 의미

굶어 죽었을 것이 뻔한 한 여인을 내가 거리에서 데려온 날을 기억합니다. 내가 밥 한 그릇을 가져와 권하자 그녀는 오랫동안 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습니다. “이게 밥이라니 믿을 수가 없어요. 너무나 오랫동안 먹지 않고 지냈거든요.” 그녀는 누구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부자들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비참한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그것이 밥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워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밥이 없어서 굶주리거나 옷이 없어서 헐벗거나 집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이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가난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원하는 이 없고, 사랑받지 못하고,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당신 자신을 찾아줄 사람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됩니다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신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협조자들은 가족에 대한 깊은 사랑이 그의 집에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만 합나다. 가정에 사랑이 머물러 있을 때만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점점 커져서 이제 당신은 사람들에게 ‘네,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후에야 당신은 그것을 당신 주변에 있는 이들과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같이 생생한 일치, 예수님이 요한복음서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바로 그 일치입니다.
우리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그러한 일치가 필요합니다.
열매란 우리의 손이 만들어 내는 것, 즉 음식이나 옷, 돈, 그 외 다른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 맺은 열매입니다. 사랑 안에서 이러한 일치를 이루려면 기도와 가난과 희생의 삶이 필요합니다.
희생과 기도는 서로 보완합니다. 희생 없는 기도 없고, 기도 없는 희생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이 세상을 지나가시는 동안 내내 성부와의 친밀한 일치감 속에서 보내셨습니다.
우리도 이와 똑같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곁에서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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