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하느님은 유죄인가?

샌. 2003. 10. 20. 12:03
어제 저녁 미사는 특별했다.
강론 시간에 바오로딸 수녀님들이 연극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 제목이 `하느님은 유죄인가`였다.
마침 어제가 전교 주일이었다. 바오로딸은 출판이나 미디어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소명으로 하는 수녀원이다.

가톨릭 신자가 된지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강론이 연극으로 대신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형식의 파격이 더욱 좋았다. 그런 파격이 주는 긍정적인 인상과 내용은 백 마디 말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감동을 주었다.

연극 내용은 다음과 같다.

神이 법정에 기소되었다.
검사와 검사 쪽 증인 두 명이 神을 고발한 것이다.

검사의 기소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킨 죄. 열심히 일해도 먹고 살까 말까 한 세상인데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고 나를 따르기만 하라니 말이다.
둘째,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들어준다고 하면서정작 어려울 때 기도를 하면 들어주지 않는 사기죄.
셋째, 나 외에 다른 神을 섬기지 말라면서 종교의 자유를 가로막은 죄.

그리고 두 사람의 증인이 나왔는데
한 사람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다가 부도가 나서 알콜 중독이 된 사람이다. 그는 뇌물과 떡값이 통하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하고 결국 폐인이 되었다. 그래서 자신을 그렇게 만든 神을 고발했다.
또 다른 사람은 남편을 병으로 잃고 어린 자식마저 사고로 죽은 불쌍한 여인이었다. 神이 존재한다면 자신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느냐며 절규하는 목소리에는 같은 처지가 된 듯 가슴이 아팠다.

결국 인간의 고통이 주제였다.
神은 왜 인간의 고통을 허용하는가?
그 분이 전지전능하다면 왜 인간의 고통을 막아주지 않는가?

이런 무거운 주제임에도 가끔은 웃음도 나오면서 연극은진행되었다.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깊이 생각케 하는진지함이 있었다.

마지막 부분의神의 변호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고통 역시 하느님의 사랑의 증거`라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해지며 약간의 충격이 왔다.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고통이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역설적인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돈과빛이 교차되는 느낌이었다.

고통 역시 이해하거나 판단하기에는 인간의 지력이 못 미치는 신비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견디기 힘든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의 심중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야 상상키 어렵겠지만 그 고통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왔는지도 인간이 헤아리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一切皆苦 - 불교에서 말하는 이 구절만큼 우리 삶의 한 측면을 참되게 표현한 것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苦를 부정적 의미의 괴로움이라고만 해석하는 대신에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의미로도 해석하고 싶다.
즉 현상계의 苦를 통해서 우리는 더 나은 초월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苦란 바로 인간의 영혼이 여기에서 벗어나 더 높이 날을 수 있는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고통을 단순히 괴롭고 회피해야 될 대상에서 神의 사랑의 표현으로 알아본다는 것이 신앙의 힘이 아닐까 한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이런 신앙의 경지라면 그 신앙은 맹목적이지도 않을 것이고, 쉽사리 神의 뜻이니 아니니 하며 시비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하느님은 그냥 지켜보고 계셨다. 아니 하느님은 예수님과 함께 그 고통을 나누고 계셨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작은 십자가 고통의 연속이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그 고통은 우리를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一切肯定 - 이런 표현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苦와 樂을 구별하고 어느 한 쪽에 집착하는 태도 보다는 둘을 하나로 아우르며 그 어느 것에서도 神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신앙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큰 박수와 함께 연극은 끝났다.
이 자리를 빌어 애써 주신 수녀님들께 감사드린다.
하느님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는 각자의 판결에 맡겼지만 당당하게 판결봉을 두드릴 사람은 우리 가운데 별로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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