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각비(覺非)

샌. 2012. 11. 29. 17:30

각비(覺非)란 직역하면 '그릇됨을 깨닫다'는 뜻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온다. 각비(覺非)는 '이제부터는 옳고 어제까지는 글렀음을 깨달았노라[覺今是而昨非]'에서 첫 자와 마지막 자를 딴 것이다.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奚추愴而獨悲

悟已往之不諫

知來者之可追

實迷塗基未遠

覺今是而昨非....

 

돌아가야지

논밭이 묵어 가는데 내 어찌 아니 돌아갈 수 있으랴

이제껏 마음은 몸의 부림을 받았으니

어찌 홀로 근심하며 슬퍼하고 있는가

지난날은 뉘우쳐봐야 바뀔 게 없고

이제 앞으로나 그르치는 일 없으리

길은 어긋났지만 그리 멀어진 것은 아니니

이제부터는 옳고 어제까지는 글렀음을 깨달았노라....

 

도연명은 호구지책으로 나이 마흔에 지방의 말단 관직을 하나 얻었다. 그러나 관리 노릇은 천성에 맞지 않아 일은 팽개치고 술이나 마시고 자연을 노래하며 살았다. 어느 날, 상관이 순시를 온다면서 의관을 단정히 하고 대기하라는 명을 받았다. 구속을 싫어했던 도연명은 "내 어찌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있으랴"[吾不能爲五斗米折腰]라며 그날로 사표를 던졌다. 고작 두 달 정도의 관리 생활이었다. 이때 고향으로 돌아가며 지은 장시가 귀거래사다.

 

변화는 지금까지의 삶이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자신이 살아온 걸 되돌아보고 마음을 속이고 자기 자신을 속였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다. 깨달음[覺]은 눈뜸이고 새로 태어남이다. 기독교의 회심(回心)이나 거듭남도 깨달음의 다른 표현이다. 세상의 길에서 하느님의 길로의 유턴을 일컫는 말이다.

 

깨달음은 아는 것과는 다르다. 아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지만, 깨달음은 내 온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은 머뭇거리지 않는다. 도연명의 경우는 상관의 순시가 방아쇠 구실을 했다. 삶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동기 Y가 이번에 명퇴를 하기로 했다고 전해왔다. 정년을 사수한다는 친구 중 하나였는데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제일 먼저 축하한다고 말해줬다. 더 반가운 건 시골에 내려가 살고 싶다면서 땅을 알아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체제 속의 삶에 회의를 느낀 것일까? 친구의 얘기를 들으며 각비가 떠올랐다.

 

삶에 대한 고민이나 반성 없이 각비는 없다. 삶의 진보도 없다. 누군가가 말했다. "가장 좋은 교육은 후회를 가르치는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면서 각비를 경험해 나가야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 편안한 안정보다는 불안한 변화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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