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송시열(宋時烈, 1607~1689)만큼 논란 많은 인물도 드물 것이다. 송시열은 조선시대 주자학을 신봉한 유학자면서 정치가였다. 치열했던 당쟁의 시대에 노론의 영수로 정국을 좌지우지했고 결국은 그것 때문에 숙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덕일 선생이 쓴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는 송시열 신화의 반대편에서 그를 파악하려는 시도다.
지은이의 결론은 책의 '나가는 글'에 잘 나와 있다. 송시열은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론을 지키는 데 목숨을 건 사람이었다. 그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로 송시열의 인물을 평한다.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子曰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
송시열은 대의(大義)보다는 소리(小利)를 따랐다. 즉, 국가나 백성보다는 당파와 학연을 우선했다. 그는 대동법이나 북벌을 반대했다. 현 교과서에는 송시열이 북벌론자로 나오는데 잘못된 것이라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특히 송시열은 주자학 절대주의자였다. 주자학을 성학(聖學)이라 부르며 주자의 나라를 건설하는 게 목표였다. 숭명(崇明)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그는 자신만이 옳고 다른 설은 사이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正)을 지키기 위해서 사(邪)는 척결해야 했다. 송시열의 가장 큰 잘못이 주자학을 유일사상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당파적으로 보면 노론의 영구 집권을 위해 주자학을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고착시켰다. 의문 없이 무조건 외워서 공부하고 출세하는 잘못된 교육의 뿌리도 여기에 있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라고 항변했던 윤휴는 사형을 당했다. 이후에는 주자학과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학문은 이단이 되었고, 주자나 공자는 조선의 신이 되었다. 학문이 다양하게 발전할 토양이 아예 말라버린 것이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노론이 조선 후기까지 집권한 것은 우리 역사의 비극이었다.
송시열은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네 임금을 거치는 동안 정국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조정에서 벼슬한 기간은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는다. 우상과 좌상에 세 번 제수되었으나 출사해 정승의 임무를 수행한 날은 49일에 불과했다고 한다. 대신에 고향에서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며 배후에서 집권당인 서인과 노론을 조종했다. 임금이 내리는 벼슬을 거듭 거부함으로써 임금을 길들이고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변화하는 조선 중후기 사회에서 완고한 주자학은 걸림돌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그들은 주자학을 권위주의, 계급주의, 가부장제를 유지 강화하는 데 이용하였다. 숙종 15년(1689)에 남인이 정권을 빼앗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은 몰락하고 여든이 넘은 송시열도 사사되지만, 5년 뒤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정권은 다시 서인 노론에게 돌아갔다. 송시열은 복권되었고 그 뒤로 노론은 200년 넘게 권력을 잡았다. 그것은 조선의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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