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내려놓고
죽을 힘 다해 피워놓은
꽃들을 발치에 내려놓고
봄나무들은 짐짓 연초록이다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는
맑은 노래가 있지만
꽃 지고 나면 봄나무들
제 이름까지 내려놓는다
산수유 진달래 철쭉 라일락 산벚...
꽃 내려놓은 나무들은
신록일 따름 푸른 숲일 따름
꽃이 피면 같이 웃어도
꽃이 지면 같이 울지 못한다
꽃이 지면 우리는 너를 잊는 것이다
꽃 떨군 봄나무들이
저마다 다시 꽃이라는 사실을
저마다 더 큰 꽃으로 피어나는 사태를
눈 뜨고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꽃은 지지 않는다
나무는 꽃을 떨어뜨리고
더 큰 꽃을 피워낸다
나무는 꽃이다
나무는 온몸으로 꽃이다
- 큰 꽃 / 이문재
지난가을 등산할 때 Y가 산길 따라 많이 자라고 있는 나무를 보고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다. 눈에 익은 나무가 아니라 모른다고 했더니 Y는 빙그레 웃으며 이게 진달래라고 말했다. 많이 부끄러웠다. 그동안 꽃만 신경 썼지 나무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꽃 모양으로 진달래와 철쭉을 구분할 줄 알지만 나무만 보면 지금도 헷갈린다. 화려한 꽃에만 눈길이 간 탓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 건 내 만족일 뿐이지 그녀 자신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사람이 아니라 내 욕망을 사랑한 건 아닌지 물어본다. 꽃만 보고 나무를 못 본다는 건 슬픈 일이다. 세상의 갈등이 여기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나무가 곧 꽃이라는 시인의 말이 더욱 절절히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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