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선생은 25세 되는 때인 1809년에 사신단의 일행으로 중국 연경에 다녀온다. 이때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중국 문인들과 교류를 한다.그의 삶에서 소중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돌아올 때 선생은 붓대에 백송 종자를 가져와 고조부인 김흥경(金興慶, 1677-1750)의 묘 앞에 심는다. 현재 천연기념물 106호로 지정되어 있는 일명 '예산 백송'이다.
우리나라에서 백송은 무척 귀하다. 그만큼 우리 토양에서는 자라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고관대작들이 주로 중국에서 들여와 심었는데 그중 일부만 살아남았을 것이다.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고택 인근에 있는 이 백송도 그래서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추사고택옆에는 백송공원이 만들어져 있고 많은 백송들이 심어져 있다. 아직 어려선지 줄기는 흰색이 아니다. 40년은 지나야 백송으로서의 특징이 나타난다고 한다.
이 백송은 높이가 14.5 m,줄기 둘레가 4.7 m이다. 그러나 세 줄기 가운데 둘은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 줄기만 남아 있다. 외과 수술을 받아 팔다리가 잘려나간 모양이다. 그래도 철저한 보호 관리로 지금은 형세가 좋아지고 있다니 다행이다. 주변에 여러 소나무들이 있지만 역시 군계일학이다.
추사 묘 앞에 있는 소나무도 눈길을 끈다. 마치 추사의 그림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소나무다. 추사고택 주변은 대규모로 단장되었고 관광지화 되었다. 과유불급이 느껴지는 현장이다.
백송 앞에서 추사의 말을 되새긴다.
"나는 70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가슴속에 천 권의 책이 있어야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