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더 살아봐야 돼

샌. 2017. 8. 14. 09:45

10여 년 전쯤 주변 상황이 무척 힘들 때였다. 벌여놓은 일이 걸림돌이 되어 모든 것이 꼬이기만 했다. 한 친구가 여주로 찾아왔다. 친구가 내 사정을 자세히 알 리는 없었다. 저녁을 같이 먹으며 친구는 자기 집의 행복을 자랑했다. 부모님이 이웃에 덕을 베풀며 살기 때문에 자신들이 복을 받고 있다는 말이었다. 친구네 집은 우리보다 훨씬 더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걱정거리가 적은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비교되는 처지에서는 심사가 편안치 않았다.

 

덕에 반드시 어떤 보상이 따라온다는 논리는 단순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현실은 오히려 반대의 경우도 흔하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선행하는 행위와 인과관계로 연결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복잡하다. 우리가 덕으로 생각하는 것이 실제 덕인지도 의문이다. 지상에서 선이라 믿는 것이 하늘의 관점에서는 악일 수도 있다. 선과 악, 좋고 나쁨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이다. 자연은 그렇게 구분하지 않는다.

 

최근에 그 친구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형편이 어렵다고 한다. 부모님은 중병으로 쓰러지셨고, 부인도 사고로 세상을 떴다. 퇴직까지 한 친구는 무척 생활에 쪼들리는 것 같다. 10여 년 전 상황과는 반대로 되었다. 인생은 짧은 것 같지만 온갖 일이 일어날 수 있을 만큼 길다. 친구가 좌절하지 않기를 빈다.

 

인생은 '일실일득 일득일실(一失一得 一得一失)'이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고,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잃는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고, 얻는다고 자랑할 필요도 없다. 일희일비하는 것은 한 면만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 나간다고 너무 들떠서는 안 된다. 도리어 겸손해야 한다. 그래야 불행에 처했을 때도 일어설 힘이 솟아난다.

 

"내가 착하게 사니까 이런 복을 받는가 봐." "내 믿음의 열심 때문에 이렇게 잘 사는 거야." 이것만큼 오만한 말도 없다. 화를 부르는 씨앗이 된다. 눈물을 흘리는 이웃을 대하는 예의가 아니다. 복과 화는 교대로 우리를 찾아온다. 화가 덮칠 때는 그때는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얼마 전 동네 모임에 나갔던 아내가 들어와서 부자가 된 자식 자랑을 하는 이웃 할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자리에는 자식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사람이 있었고, 이혼해서 손주를 키워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주책없는 사람이 있다. 잘 나간다고 생각될 때 조신해야 한다. 모임을 끝나고 나오며 어느 분이 혼잣말로 이러더라고 했다. "인생은 몰라. 더 살아봐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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