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이 가슴을 울린다. 특수학교 설립을 위한 공청회에서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 장애아를 가진 부모들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은 사진이다. 어제 서울 강서지역 공립 특수학교 신설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는데 주민들의 항의로 무산되었다. 서울시교육청은 가양동 옛 공진초등학교 부지에 지적장애인 140명이 다닐 수 있는 특수학교 설립을 4년 전부터 추진해 왔다.
이런 소동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수학교가 들어선다 하면 주민 반대 데모가 벌어진다. 이 때문에 서울 지역에서는 지난 15년간 공립 특수학교가 한 군데도 생기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서울에서 특수교육이 필요한 장애학생은 1만 명이 넘는다. 이중 특수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4천여 명에 불과하다. 그래서 통학하는데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경우도 많다.
문화의 차이인가, 서양에서는 공동묘지도 주택단지 가운데에 있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다. 특수학교를 반대하는 주민 입장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경제적인 이유가 제일 큰 것 같다. 돈에 오염된 우리의 민낯이 드러나는 듯해 참담하다. 무릎 꿇은 학부모에게 죄송하기만 하다. 내가 반대로 그들에게 무릎 꿇고 싶다.
특수학교 설립을 모든 주민이 반대하는 건 아닐 것이다. 만약 우리 동네에 특수학교가 들어온다면 나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당장 닥치지 않아선지는 몰라도 인간의 양심상 반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역지사지로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다. 특수학교가 들어선다고 주변 환경이 나빠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반 학생들이 말썽을 피우는 게 훨씬 많다.
살면서 내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힘 있는 자의 갑질이 여러 차례 사회 문제가 되었다. 을의 아픔을 알면서 같은 짓을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다. 눈물을 닦아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의 가슴에 못을 박아서는 안 될 일이다. 인간의 도리가 아니다.
장애인 교육을 담당했던 어느 분이 자신의 경험을 '오마이뉴스'에 올렸다. 이 분은 '최소한 무릎 꿇리지는 말았어야 했다'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약자와 소수자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에 다름 아니다. 그런 사회는 아무리 GDP가 올라도 선진국이 되자면 아직 멀었다.
무릎 꿇리지는 말았어야 했다
1.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나거나, 양육과정에서 장애아동으로 판명난 경우, 경제적인 상황이 어찌 됐든 내가 만나본 모든 '엄마'가 직장을 그만뒀다. 아이가 '정상인'이 될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기 위함이었다. 이는 '조기 개입'이라는 특수교육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데, 적절한 시기에 적확한 판단에 따른 정확한 조기 교육이 행해질 경우 장애 정도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특수교육 이론적 견해가 있다. 이 '실낱같은 가능성'이 양육자로 하여금 모든 것을 제쳐두고 특수치료 교육에 전념하게 한다고 한다. 2. 또한, 젓가락질, 단추 잠그기 등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활동에 필요한 교육은 주로 가정에서 이뤄지는데, 이 역시 일반 아동과 장애아동의 교육 방법이 다르다. 장애아동은 부모가 어렸을 때 배웠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가르칠 수 없을 수 있다. 더 오래 참아주어야 하고, 놀이 등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할 경우 다른 방식으로 반복 훈련을 시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 기관이나 치료사 등 특수교육 전문가의 교육 노하우가 필요하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교육에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할머니나 다른 가족이 양육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역시 가정 단위에서 이뤄지는 미시적이고 개별적인 방식이다. 비용을 지자체에서 보조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중장기적인 성취 목표를 세우고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꾸준히 반복 훈련해야 효과가 나타나는 특수교육에 있어서 사교육 비용은 정말 큰 부담이다.
2-1. 내가 다니는 교회에는 장애인을 위한 여러 교육 프로그램들이 개설돼 있고, 연령대에 맞는 활동들 (직업교육, 특수치료 등)을 할 수 있다. 내가 인터뷰한 장애인들의 삶은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진로는 대부분 막막했다. 접시 닦기 등 단순 노동에 비정규직으로, 최저임금을 받고 종사했다. 그나마도 운이 좋거나 장애 정도가 경미할 경우의 이야기였다. 3. 자녀 중 한 명에게 장애가 있을 경우, 양육자의 역량이 장애아동에게 집중돼 다른 자녀에게 필요한 양육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았다. 양육자가 다른 자녀 혹은 가정을 보살필 여력을 갖기 어렵다. 장애아동이 교육 시설이나 치료 프로그램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이 다른 자녀나 가정을 보살필 기회였다. 교회에서 가는 2박 3일의 여름 수련회, 학교에서 가는 2박 3일의 수학여행 정도가 양육자의 유일한 휴식 기간이라는 응답이 많았다.
4. 슬프게도, 내가 만나 본 모든 장애아동 가정에서 '어머니'가 양육의 책임을 자신이 거의 전부 담당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한 움직일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의 경우만 '안아 들고 계단을 내려가는', 어머니의 육체적 한계로 불가능한 일의 경우 아버지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지자체의 비용 지원으로 고용한 활동보조인이 그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 아버지나 활동 보조인이 없는 시간대나 날짜에는 장애인은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다. 4-1. 특수교육론 교수님이 한 말 중에 가장 충격적이고 현실적인 부분은 이거였다. "여러분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여기 수업을 듣고 있는 모든 여학생들은 모두 훌륭한 직업인이 될 꿈을 갖고 있겠지요? 교사가 되기 위해 이 수업을 듣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여태까지 지켜본 바로는 '장애인을 낳지 않는 것'이 여성의 커리어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이 사회는 장애인과 그 양육자에게 너무나 각박하며, 모든 것을 '엄마 책임'으로 돌립니다. 대부분 장애아동의 '양육자'는 99% 어머니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직장을 가져도, 아무리 좋은 학교를 나와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도 여러분이 장애인을 낳는 순간 여러분은 경력 단절 여성이 될 겁니다. 여성인 여러분에게 가혹한 이야기지만 지난 수십 년간의 특수교사 경험에서 제가 얻은 교훈입니다." 교실은 참담한 분위기였다. 4-2. 그리고 나는 똑같은 이야기를 인터뷰이에게서도 들었다. 그 어머니는 아이를 낳기 전 학교 교사였으나,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뒀다고 했다. 이 아이를 낳고 나서는 자신의 인생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매일의 일과는 첫째 아이를 등교시킨 뒤 장애가 있는 둘째를 차에 태우고 특수치료 교실들을 전전하다가 아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차리고 첫째와 남편의 식사를 준비하고, 첫째의 공부를 봐주며 둘째를 케어하다가 잠드는 일이라고 했다. 5.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장애인 여자 친구는 다운증후군 환자였다. 그 친구와 집이 같은 방향이라 몇 번 같이 등하교하다가 친해졌었다. 어느 날 그 친구의 어머니를 만났고 그 분은 내 손을 꼭 잡으며 "우리 아이와 친하게 지내줘서 정말 고맙다, 우리 애는 15살까지밖에 살 수 없으니 올해 친하게 지내줬으면 한다, 잘 대해주고 다른 친구들이 괴롭히지 못하게 지켜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집에 가는 내내 친구가 죽는 상상을 하며 엉엉 울었고, 그 뒤로 누가 그 친구를 놀리기라도 하면 길길이 날뛰며 쌍욕을 하고 입에 거품을 물며 싸웠던 기억이 난다. "OO이 올해까지밖에 못산단 말이야! 괴롭혀서 더 빨리 죽으면 어떡해 이 개XX야! OO이 죽으면 니가 죽인거야!" 걔를 괴롭히던 같은 반 남자애한테 고래고래 악을 써서 결국 울면서 사과하게 만들었던 기억도 있다. 6. 그 친구를 올해 여름, 교회 청년 장애인부 여름 캠프에 보조교사로 봉사하러 갔다가 만났다. 다행히도 죽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서 제공하는 교육 프로그램에서 미술을 배우며 지낸다고 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간 일을 했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했다. 7.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장애인 남자 친구도 그 캠프에서 만났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접시 닦는 일을 한다고 했다. 한 1년마다 가게를 바꾸면서 '경력을 쌓고 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최저시급을 받고, 쉬는 날은 없고, 하루종일 일하고, 이 캠프에 오기 위해 주말에도 빠지지 않고 일을 해야 했다고 한다. 그가 받는 처우나 임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삼켰다. 번 돈으로 영화를 보거나, 할머니 용돈을 드린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그 친구는 "다양아! 안녕! 정말 오랜만이다! 반가워!"라고 3일 내내 아침마다 내 손을 잡고 인사했다. 중학교 때랑 똑같았다. 8. 친구 어머니가 왜 나에게 '우리 딸은 올해까지 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는지 나는 그 마음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식이 곧 죽는다고 거짓말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단 1년만이라도 학교에서, 자신이 없는 곳에서 아이를 지켜 줄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9. 장애인이 살기에 각박한 사회인 것, 장애인 양육의 책임이 가정·종교 단체에게 아직까지도 전적으로 위임되고 있다는 것, 사회 안전망에 대한 고민, 장애를 가진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됐을 때, 우리 사회에 그들을 위한 자리가, 또는 기회가, 또는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오래 했다. 이런 고민을 다 같이 하는 사회를 바랐다. 나는 비록 내 앞가림도 못하는 취준생 신분이지만, 사업장을 가진 사장님이, 혹은 인사 담당자가, 혹은 정책을 마련하는 공무원이, 국회의원이, 아니 아무튼 그 누군가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준다면, 힘이 있는 누군가가 힘을 써준다면,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이 이야기를 그들이 들어줄까, 어떻게 쓰면 그들에게 가 닿을 수 있는 힘있는 글이 될까 생각하며 오래 머뭇거렸다. 10. 그리고 나는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을 위해 무릎 꿇은 '양육자', '어머니'들의 사진을 보았다. 교육시설과 교육 기회, 특수교육 시설의 의미를 '일반 사람들'이 모를 수 있다는 것 이해한다. 하지만, 최소한, 무릎 꿇리지는 말았어야 했다. 무릎을 꿇는 지경에 이르도록 내버려 두지는 말았어야 한다. 그 고개 숙인 어머니들에서 '올해까지만 잘 지내달라던' 친구 어머니를 본다. '어떻게 이렇게 귀한 생각을 했어요' 하며 내 손을 잡아주시던 인터뷰이 어머니들을 본다. '장애아동을 낳지 않는 것이 여성 커리어에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하며 눈물을 닦던 특수교육론 교수님을 본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오늘도 협상이 결렬된 '교육 시설'에 대한 논의에서 무릎에서 나는 꺾이고 부러진 사회의 추악한 민낯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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