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중세의 사람들

샌. 2018. 12. 23. 11:30

우리가 접하는 역사는 대부분 왕이나 위인, 전쟁 이야기로 되어 있다. 평범한 민초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사료의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하지만, 나에게 영웅들의 이야기보다 더 궁금한 것은 당시 민중들의 삶이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민중의 일상을 알고 싶다.

 

<중세의 사람들>은 그런 호기심을 일부 채워주는 책이다. 서양 중세시대에 살았던 여섯 사람의 삶을 복원했다. 프랑크 왕국의 농부 보도, 베네치아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 수녀원장 에글렌타인, 14세기 파리의 주부인 메나지에의 아내, 상인 벳슨, 직물업자 페이콕이 등장한다. 마르코 폴로를 제외하고는 보통 사람들이다. 픽션이 아니라 사료를 바탕으로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재현했다.

 

서양의 중세는 암흑시대라고 배웠다. 종교와 신분의 이데올로기에 갇힌 어둡고 암울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의외로 밝고 자유분방하다. 수녀원장을 비롯한 중세시대의 수녀도 상당히 파격적인 행동을 한다. 결코 종교의 족쇄에 갇히지 않았다. 사상적으로는 정체되었을지 몰라도 실제 서민들의 삶은 이념과는 관계가 없는 듯하다. 오히려 의심 없는 하나의 신앙이 행복을 주었을 수도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근본은 중세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여섯 명 중에서 페이콕을 보자. 그는 헨리 7세 시대에 에식스의 직물업자로 활동한 사람이다. 당시 잉글랜드의 주산업이 직물업이었다. 그는 모직물을 생산하는 동시에 무역업을 하며 돈을 많이 벌었다. 동시에 지역 사회에서 존경 받는 사람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유언장이다.

 

페이콕은 가족이나 친척 외에 자신을 위해 일한 선량한 이웃에게도 유산을 물려주었다. 그의 유산 상속 대상은 수백 명에 달한다. 유언장에는 누구누구에게 얼마를 주라는 내용이 가득 담겨 있다. 지금 시대로 대하면 이런 식이 될 것이다. 아파트 청소하러 오는 분에게 백만 원, 폐지 줍는 할머니에게 이백만 원, 엄마 없는 아이의 간식비로 백만 원, 성당 유치부에 삼백만 원, 친구 누구의 빚을 갚아주는데 천만 원, 등등.

 

이런 유산 나누기가 일반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가진 사람의 이런 선행이 힘든에 숨통을 트이게 하지 않았나 싶다. 페이콕의 행위는 중세의 구조적인 차별과 착취 이면에 보이는 신선한 햇살이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때보다 훨씬 더 돈에 집착한다. 그리고 유산은 대부분 자식에게만 물려준다. 유산의 1/10 정도는 사회로 환원하는, 페이콕처럼 비록 액수가 적을지라도 이웃과 감사히 나누는 풍토가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면 우리 사회가 훨씬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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