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몸과 인문학

샌. 2018. 12. 29. 11:54

동의보감의 눈으로 본 문명 비평 에세이다. 고미숙 선생이 썼다. 신문에 연재된 칼럼이라 길이가 짧고 쉽게 이해된다. 대신 깊은 내용을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다.

 

글 내용은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시원하다. 여덟 개 목차는 몸과 몸, 몸과 여성, 몸과 사랑, 몸과 가족, 몸과 교육, 몸과 정치사회, 몸과 경제, 몸과 운명으로 되어 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우리는 우리 '몸'의 주인이 아니다. 병이 나면 의사와 의료기기의 처치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몸을 상품화하는 데도 기꺼이 동참한다. 우리가 겪는 숱한 질병과 번뇌의 원인이 여기서 시작한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에서는 선생의 해박한 지식과 우리 사회에 대한 진단이 명료하게 읽힌다. 특히 스위트 홈이나 모성 신화를 거침없이 공격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워낙 프로이트 심리학이 위세를 떨쳐선지 유년기의 애정 결핍 상처를 과대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선생은 그 모든 것을 가짜라고 말한다. 상처를 호호 불며 징징대는 어른 아이가 너무나 많다.

 

이 책은 동의보감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제반현상을 짚어 본다지만, 동의보감에 담긴 우리 몸이나 우주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다른 책을 참고해야 할 것 같다. 책에 나온 글 중에서 하나를 골라 본다. '아기를 업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다. 요사이는 아기를 업은 모습을 거의 보기 힘들다. 할머니도 아기를 업지 않는다. 그런데 선생은 아기는 업어서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음양의 관점에서 설명한 게 그럴듯하다. 엄마와 아기 사이에서도 거리가 필요하다는 세번째 이유도 음미해 볼 만하다. 이렇듯 다양한 시각으로 우리 주변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함을 배운다.

 

 

아기를 업어야 하는 세 가지 이유

 

아기는 당연히 업어서 키워야 한다. 헌데, 언제부턴가 아기가 업힌 모습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모든 엄마들이 아기를 품에 안고 다니기 때문이다. 엄마뿐 아니라 아빠도, 심지어 할머니조차 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하다. 대체 왜? 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 참 아름답고 세련되어 보인다. 그럼 아기를 업게 되면? 왠지 촌스럽고 덜떨어져 보인다. 그렇다. 포인트는 거기에 있었다. 미적 욕구가 모성을 압도해 버린 것이다. 미시족을 위한 육아상품들이 쏟아지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하지만 아무리 미모가 중요하다 한들 아기의 생명력을 억압해서야 되겠는가. 생명의 이치상 아기는 무조건 업어야 한다.

 

첫번째 이유. 아기는 양기 덩어리다. 온몸이 불덩이에 가깝다. 따라서 음양의 이치상 음기가 필요하다. 아기들이 '할머니의 품'을 좋아하는 것도 그때문이다. 할머니는 여성인데다 노인이라 음기의 결정체에 해당한다. 당연히 아기들과는 '찰떡궁합'이다. 그래서 <동의보감>에는 이런 육아법이 나오기도 한다. "아이에게 70~80세 노인이 입던 헌 잠방이나 헌 웃옷을 고쳐 적삼을 만들어 입히면 진기를 길러 주어 오래 살 수 있다." 업어야 하는 이치도 비슷하다. 심장은 특히 불이다. 그런데 안고 있으면 엄마의 심장과 아기의 심장이 서로 마주보게 된다. 곧 맞불이 붙는 형국이다. 그렇게 되면, 아기는 양기가 더욱 항진될 것이고, 엄마 또한 열이 올라 그 자세를 오래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또 각종 상품들이 등장했다. 아기를 오랫동안 안고 다닐 수 있는 우아한 베이비 상품들. 하지만 과연 아기도 그걸 좋아할까? 아니, 그 전에 그런 패션은 엄마의 허리에 엄청 무리를 준다.

 

두번째 이유. 등은 서늘하다. 족태양방광경이라는 정맥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이 정맥은 신장과 방광으로 이어진다. 신장, 방광은 물을 주관한다. 해서 등에 업히면 아기의 심장뿐 아니라 몸 전체의 양기가 차분하게 수렴된다. 아기의 시선도 훨씬 넓어진다. 엄마의 등에서 보는 세상은 흥미진진하다. 지나가는 사람들, 온갖 색깔들, 움직이는 물체들. 아기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혼융되어 있다. 그래서 마법의 천지다. 그 파노라마를 음미하는 것이 아기한테는 최고의 놀이이자 공부에 해당한다.

 

세번째 이유.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게 되면 '내 아이는 특별해!' '오직 내 아이만을!' 등의 감정에 휩싸이기 쉽다. 하지만 그것만큼 지독한 편견은 없다. 가족주의를 심화시킬뿐더러 엄마가 자식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망상이 싹틀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성과 자본이 만나면 이 망상은 '하늘만큼 땅만큼' 커진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엄마와 아기는 각자 자기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아기를 업으면 엄마는 아기한테 집중하기보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다. 청소를 하고,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아기가 등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처럼 엄마 또한 자신의 일상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서로가 서로에게 배경이 되는 관계, 엄마와 아기가 각자 자기의 삶을 확충해 갈 수 있는 관계, 엄마의 등은 그것을 훈련할 수 있는 최고의 현장이다. 그러니 부디 안지 말고 업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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